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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론,에피소드

(속) 서양음악사

고대음악(기원전 5000년 - 3세기)

 

음악이 어느 때부터 인간 세계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많은 민족들은 신이 음악을 만들었다는 신수설(神授設)과 자연 발생설(自然發生設)을 믿고 있다.
인류가 역사를 알게 된 것은 말이 있고 글이 생긴 이후의 일이며 그 이전의 일들은 상상으로 밖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음악의 발생에 관한 설은 세계의 어느 민족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은 지혜가 생겨 진보함에 음을 이용하여 말을 만들어 이야기하게 되었으며 느끼는 바를 음악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음악은 말의 한 종류라고 간주되며 말은 음악의 변형이기도 하여 그 근원을 구분 하기가 어렵다.
미개한 민족에 있어서도 어떤 형태이든 간에 음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음악은 분명히 인간의 본능의 하나라고 하겠다.
그리고 발굴된 고대의 유물로 보아도 여러 가지 모양의 음악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것만 보더라도 음악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아무리 유치하가도 해도 문화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음악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의 악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음악은 그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며 불가사의하지만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이다.

음악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많은 학설도 있으나 결정적인 것은 없다.
그 중 독일의 음악학자인 C.작스(Curt Sacks 1881-1959)는 선율의 발생 과정을 설명하면서 <음악은 노래 하는 노래부터 시작되었다.>는 설을 제창하였다.

인류가 발생하여 오랜 기간을 통해 짧은 억양을 붙여 부르는 소리는 멜로디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고대의 음악은 고대의 이집트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의 중간인 오늘날의 이라크 지방에 해당하는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오늘날의 이스라엘, 유대, 페니키아안 팔레스티나(Palestina), 오늘날의 터어키인 소아시아, 그라이스 드으이 나라에서 발달했는데 로마가 이들 나라를 통일 할 때까지는 각기 그 지방에서 발달하였다.
그리고 인도와 중국 등의 민족도 대단히 우수한 음악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고대 그리이스와 같은 나라는 음악을 단지 제사와 오락뿐만 아니라 매우 지적으로 다루었으며 음악에 대한 철학성, 윤리성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요소가 논의되었고 과학적인 연구를 했으며, 음악을 교육상 대단히 중요시하였다.
그러므로 고대의 대부분의 음악 문화는 그리이스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음악의 역사의 흐름을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혹자는 고대의 음악을 위에서 언급한 대로 기원전 5000년 경부터 3세기 경까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또 어떤 학자는 음악의 시작에서 그리스도교 음악이 융성할 때까지를 고대음악으로 구 분하고 있다.

1. 고대 동방의 음악 : 인도,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이집트, 이스라엘 등의 음악은 기원전부 터 융성했던 기록이 있는데, 앗시리아, 이집트에는 하프, 나팔, 큰북, 심벌즈 등의 악기가, 이스라엘에서는 비파와 같은 현악기가 사용됐다.

2. 고대 그리스 음악 : 고대 민족 중 가장 문화적인 민족이어서 학문과 예술에 많은 발달을 보았다. 시와 결부된 음악이 발달했고, 피타고 라스는 현재 쓰이고 있는 음계의 바탕이 되는 피타고라스조를 만들어 내기도 했으며, 악보의 시초인 문자보를 발명하였다. 그리스 음악은 오 늘날 서양 음악의 토대가 된 것이다.

3. 고대 이집트 음악 : 기원전 3000여년 전부터 높은 문화를 가진 이집트는 여러 가지 타악기를 쓰고 있었다.

4. 고대 로마 음악 : 그리스 음악을 계승한 로 마(BC146년에 그리스를 멸망시킴)는 그리스의 음악가를 데려다 그 음악을 생활의 장식 또는 관능의 자극으로 썼을 뿐이며, 계속되는 전란으 로 필요상 취주악기를 중시하여 군악대를 조직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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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음악

(The Middle Ages : 400 - 1400)

 

중세는 봉건 사회의 지배 하에 있던 그리스도교의 사회로서 정치 문화에 있어서 강력한 종교적 지배를 받던 시대였다.
따라서 고대와의 차이를 보인 것은 노예 제도에서 소작제 (小作制) 로 옮겨져서 상업 자본의 진출이 두드러진 때의 일이기도 했다.
중세기의 음악사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의식과 결부시킨 성가(聖歌)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중세기에 유럽 음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리스도교를 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교는 그 모태가 된 유대교의 영향도 있지만 그 밖에 음악을 존중하여 초기 단계부터 독특한 의식 음악을 발전시켰다.
신을 섬기고 신에게 봉사하는 정신력이 때로는 인간의 한계를 넘는 힘을 발휘한 것은 건축예술에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 있다.
문화가 낮은 원시 민족들도 훌륭한 신전(神殿)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에서도 5백년, 8백년 전의 교회 건축이 이처럼 훌륭한 데는 종교의 위대함 때문으로 여겨져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교는 음악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교회를 온상으로 하여 많은 작곡가가 배출되었다.
그러므로 중세기의 유럽 음악은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발달하였다.

종교 음악의 중심은 성악이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성가는 기본적으로는 고대의 유대교 성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 되지만 거기에 지방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시리아에서는 시리아 성가, 이집트에서는 코프틱 성가(Coptic church music) 이디오피아에서는 아비시니아 성가, 동 로마에서는 비잔틴(Byzantine)성가 등 각기 그 지방의 고유한 성가가 발달하였다.
서 유럽에서도 이들 동방 교회의 성가와 지중해 지역의 여러 음악적인 요소의 영향을 밑에 독자적인 성가를 만들어 냈다.

스페인에서는 토레도를 중심으로 모사라베 성가(Mozarabic Chant), 프랑스에서는 갈리아 지방의 갈리아 성가(Gallican Chant), 이탈리아는 밀라노를 중심으로 암브로시오 성가(Ambrosian Chant) 그리고 로마를 중심한 로마 성가(Roman Chant) 등이 나타났으며 여기서 무대는 서 유럽으로 옮겨져 본격적인 중세 유럽의 음악사가 시작된다고 하겠다.

얼마 안 되어 로마의 교회 세력이 크게 떨치자 교회를 중심으로 세계적 보편적인 교회의 이상을 높이게 되자 지금까지 지방에서 행해지던 교리와 의식, 성가 등을 일정한 형식으로 통일 하게 되었다.

성가의 경우, 암브로시오 성가 이래 200년이 지나 교황 그레고리우스(Gregorius 540-604)의 업적으로 <그레고리오 성가>를 정하여 마침내 그리스도교 음악을 통일시켰다.
이 정통적인 교회 음악인 그레고리오 성가는 단성부 음악으로서 하아모니와 대선율도 없는 단순한 것이지만 그 유동적인 선율은 실로 아름답다.
이것은 유대, 시리아의 음악과 그리이스와 로마 음악을 사용하여 6세기 말에 집대성되었는데 11-12세기에 최고로 번성하였다.
그 사이 9-10세기에 설쳐 고딕 음악이 생겼다.
중세 음악은 대체로 로마네스크 음악(Roma-nesque music), 고딕(Gothic)음악, 세속 음악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로마네스크 음악(Romanesque)

로마네스크 음악은 특히 7∼9세기 사이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발달한 단성적인 교회 음악 양식, 즉 그레고리오 성가로, 로마풍의 음악이란 뜻인데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음악이다.
이는 그리이스에서 전해 올 옛 양식의 음악과 대치할 만한 것이다.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St.Ambrosius , 340∼397)는 성가의 완성을 꾀하여 4선법을 만들고, 이어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우스(Gregori us, 540∼604)는 8교회 선법을 만들어 이를 바탕으로한 단성 성가를 제정했는데, 이것을 '그레고리안 성가' (Gregorian Chant)라 한다.


고딕(Gothic)음악

9세기 경부터 15세기까지의 로마네스크와 르네상스 시대 음악이다.
당시 교회의 건축은 고딕 양식이 전면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가늘고 긴 그리고 끝이 뾰죽 한 창문과 입구, 하늘에 우뚝 솟은 탑, 공상적인 괴상한 조각들을 사용한 섬세하고 힘찬 표현 등을 특징으로 한 건축이 성가의 정선율(定旋律)인데 대해 춤의 멜로디와 사랑을 선율이 다른 가사와 틀린 가사와 틀린 박자로 같이 노래해 메아리칠 때 이는 그대로 고딕 건축을 연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고딕 음악에는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에 걸쳐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중심으로 발전한 복음악의 노트르담 악파(School Notre Da-me)와 아르스 안티콰(Ars antique)의 음악이 포함되어 있다.

세속 음악(Secular music)

종교 음악 이외의 것을 넓은 의미에서 세속 음악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기사들 사이에서 생겨나, 서민에게 퍼졌는데 프랑스와 독일 등지에서 특히 성행하였다.
다시 말하면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에 걸쳐 유럽에는 십자군 사건이 있었다.
유럽 여러 나라의 그리스도 교도가 그리스도의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공격한 오랜 기간의 전쟁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지만 문화면에 끼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이래 극단적인 종교열은 침체하여 법왕의 권력은 쇠약해졌다.
아라비아 등 동방의 문명을 유입하여 르네상스의 근본적인 계기가 되었다.
기사도가 번영하여 생할이 화려하게 되었으며 나아가서는 예술상의 낭만적인 바람이 불어오게 되었다.

이같은 시기에 나타난 것이 "트루바두르(Troubadour)", 이탈리아 말로 트라바토레 (Travatore)라는 음악인들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12세기 경부터 스페인과 남 프랑스 지방에 신분이 높은 귀족으로서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작의 시에 노래를 즉흥적으로 불렀다.
여러 곳의 왕궁과 귀족의 저택을 방문하여 간단한 악기의 반주로 그것을 노래했다.
그것을 "트루바두르"라고 했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에서 생긴 "트루베르"도 대체로 같은 것이다.
시의 내용은 사랑 노래와 발라드풍의 이야기, 자연의 찬미, 종교적 또는 도덕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예인(藝人)도 고용하여 다녔는데 자작의 시를 그들에게 노래시켰다.
이들을 프랑스에서 는 8세기 경부터 종글뢰르(Jongleur), 영국에서는 민스트렐(Minstrel)이라고 했다.

13, 4세기 경에는 독일 남부에서 오스트리아에 걸쳐서 "미네젱거(Minnesanger)"라는 음유 시인 (吟遊詩人)이 있었다.
미네는 사랑의 뜻이므로 사랑의 가인(歌人)을 말하는데 서정 시인이라 하겠다.
14세기, 독일에서는 명가수라는 "마이스터징거(Meistersinger)"라는 음악인이 있었다.
이는 기사도가 쇠퇴하고 서민 계급이 일으킨 음악 운동인 것이다.

기보법(Notation)의 발명

교회 음악에서는 새로운 기보법(記譜法)을 생각해 냈다.
그레고리오 성가를 위한 기보법은 그리이스 말로 네우마(Neuma)라 했으며 9세기에 창안해 냈다.
11세기 경에 이탈리아의 귀도 다레쪼(Guido d'Arezzo 995경∼1050경)는 네우마를 4선보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계이름부르기(Solmization 階名唱法)도 고안하였다.
성 요한의 찬가의 각행의 개시음(開始音)은 온음계순으로 되어 있으므로 그 음에 해당되는 글자를 순차대로 하였다.
이것이 도레미파솔라의 창법인데 지금 도에 해당하는 음을 Ut라 했고 현재 사용하는 Si는 없었다.
Ut는 Do로 고쳐 부르기는 1670년 경이며 Si를 넣은 것은 1600년 경이다.

정량 기보법(Mensural notation 定量記譜法)

13세기 경 쾰른의 성 요한 수도원의 수도시이며 교사인 프랑코 데 콜로니아(Franco de Colo-nia)에 의해 정량 기보법이 창안되었다.
4선 네우마의 악보는 시편과 찬가가 단음일 경우에는 부자연스럽지 않지만 복음악의 합창곡 일때는 음의 높이 이외에 길이의 지시가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네우마의 모양에 의해 시간의 길이를 표시하려는 것을 정량 기보라 하고 그것을 기록한 악보를 정량 악보 혹은 측정 음보(測定音譜)라 했다.
기보법이 오늘에 와서는 5선보로서 퍽 편해져 복잡한 것도 바르게 기록할 수 있고 표현하기도 쉽지만 이것이 완성되기까지는 천여년의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참고)폴리포니 (Polyphony): 폴리포니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다성(多聲)을 의미하며 다성음악 이라 번역된다. 즉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그레고리오 성가와 같은 단선음악(單旋音樂:모노디)을 제외하고, 그 이후 현대까지의 유럽 음악은 모두 폴리포니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관용으로서의 폴리포니, 즉 다성음악은 가장 좁은 의미로 말하면 대위법적 기술을 사용하여 만든 음악이다.
폴리포니를 완전히 정의하자면 2개 이상의 독립된 성부에 의해 구성된 악곡이라고 하는 편이 낫다.

(참고)교회 선법 : 서양 중세의 종교음악은 모두 8개의 선법, 즉 도리아 선법, 히포도리아 선법, 프리기아 선법, 히포프리기아 선법, 리디아 선법, 히포리디아 선법, 믹솔리디아 선법, 히포 믹솔리다아 선법의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명칭은 모두 고대 그리스의 선법 이론에서 계승된 것인데, 그리스 음악 이론에서의 명칭과 서양 중세 음악이론에 있어서의 명칭은 일치되어 있지 않다.

(참고) 네우마(Neuma) : 중세의 음악, 주로 그레고리오 성가의 기보법으로서 쓰이는 기호이다.
그러나 이 명칭은 비잔트 성가, 아르메니아 성가, 러시아 성가 등 동방권에 속하는 성가의 기보법으로서 쓰여지는 기호에도 적용된다.
네우마는 단순히 선율의 움직임만으로 나타내는 보통 네우마와 특수 연주 방법을 나타내는 네우마의 두 가지로 분류된다.
네우마는 점(點)과 선(線) 또는 면적을 나타내는 부호인데 음의 높이를 암시하는 노랑, 빨강의 색선을 포함한 3∼4선의 보표로 되어 있고 이 는 후에 C와 F의 문자에 의한 음자리표의 고안, 또 고딕(Gothic)에 가서는 정량음표(定量音 標)의 발달로 가락과 리듬까지 기보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정량음악 : 주로 중세와 르네상스기의 음악이론으로서, 리듬의 자유로운 단선가와 대립 된 것으로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정량 음악이란 13~16세기의 음의 장단이 엄격하게 규정된 음악을 뜻한다.
그러나 악센트의 주기적인 반복의 의미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근대의 음악 을 정량음악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근대의 음악은 정량음악이 아니라 마디에 의한 음악)
각 성부의 리듬의 독립을 존중하고, 악센트의 주기적인 반복을 하는 르네상스기의 플랑드르 악파의 폴리포니 작품이야말로 정량음악의 전형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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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음악

(The Renaissance : 1400~1600)

 

흔히 중세를 암흑시대라 하는데 어둡고 옹색했던 중세는 르네상스에 의해 눈을 뜨게 되었으며 밝은 인간성을 찾게 되었다.
음악도 르네상스에 의해 중세적 속박에서 벗어나 근세풍으로 자유롭게 되었다.
르네상스를 재생, 혹은 문예 부흥이라고 한다.

르네상스 음악이란 르네상스 문화의 일부를 이루는 음악적인 현상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사실 어느 시대의 어떤 현상이 르네상스적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이는 옛날, 특히 고대 그리이스와 로마의 문예와 정신이 새로 재생하여 새로운 것으로서 성장, 발전하는 것이다.
도시 생활이 빨리 발달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시민 계급간에 봉건 사회 와 종교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여 자유로운 정신 활동을 하려는 풍조가 생겼던 것이다.
이것은 다시 서 유럽으로 확대되었으며 나아가서는 독일에서의 종교 개혁을 통해 교회의 권위에 항거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 본래의 정신을 되찾으려는 것이었다.
이같은 사조는 마침내 자본주의를 낳게 했으며 세계는 새로운 변화의 양상을 맞게 되었다.
이같은 새로운 변화가 14, 5세기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음악 분야에 있어서는 15세기의 네덜란드의 음악이나 14세기의 새로운 음악(Ars no-va)도 르네상스 음악의 하나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로 16세기를 르네상스 시대라 보고 있다.
말하자면 교회에 예속되었던 중세 이래의 예술을 해방시켜 고대 그리이스, 로마의 합리주의에의 부흥을 기도하려는 것이 르네상스의 예술이다.


음악사상 이같은 정신이 음악에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 것이 고딕과 바로크의 중간인 16세기의 음악이다.
16세기에는 음악이 여러 나라에서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르네상스 음악은 주로 이탈리아에서 발달 했는데 그 방법에 있어서는 로마와 베네치아가 좀 다르다.
로마에서는 교회 음악이 현저하게 발달했으며 팔레스트리나와 같은 대가를 배출하였고 오라토리오에 있어서도 크게 발달하였다.
베네치아(Venetian)에서는 주로 세속적인 음악과 기악으로 알려졌으며 교회 음악에는 화려한 2중창의 방법도 사용되었다.
베네치아에는 안드레아 가브리엘리(Andrea Gabrieli 1510-1586)와 그의 생질 지오반니 가브리 엘리(Giovanni Gabrieli 1554경-1612)가 성악을 화려하고 자유롭게 만들었으며 기악도 발전시켜 르네상스의 정신을 발휘하였다.
로마에서는 앞서 말한 대로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약 1525-1594)가 무반주 아 카펠라(a capella) 양식의 교회 합창곡에 새로운 양식을 도입하였다.
그런데 더 한층 르네상스적인 것은 독일의 음악이다.

독일에서는 네덜란드 출신이 랏수스 (Or-landus Lassus 1532경-1594)가 1556년 뮌헨에 와서 팔레스트리나와 같이 무반주 합창곡을 위시해서 많은 세속적인 음악을 작곡하였다.
그같은 점으로 보아 그는 팔레스트리나보다 더 르네상스적이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개혁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교회의 코랄(Chorale 성찬가)은 더욱 그렇다.
이 는 민요풍의 간소한 가락을 가장 높은 성부(聲部)에 둔 한 음 대 한 음의 화성적인 것으로써 누구나 노래하기 쉬운 합창곡이다.
이 노래야말로 르네상스적이라고 하겠다.

한편 영국에서는 당시 성행하던 클라비어(Kla-vier)와 쳄발로(Cembalo)의 일종인 버어지널 (Virginal) 음악과 버어드(William Byrd 1542경-1623), 그 밖의 합창곡 등이 있다.


악보 인쇄의 발명

악보의 인쇄는 1500년 경에 시작되었는데 1455년에 성서 인쇄의 뒤를 이어 발달하였다.
악보 인쇄로 음악의 발전은 박차를 가하게 되었는데, 16세기 초부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독일에서 인쇄되었다.
이로 인하여 악곡의 보급과 보존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는 음악 문화 향상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바로크음악

(The Baroque Ages : 1600-1750)

 

바로크 음악이라고 하면 대체로 16세기 말경부터 1750년경까지의 음악을 말한다.
16세기 말은 "지오반니 가브리엘리"를 중심으로 하는 베네치아 학파의 시대이며 1750년이면 바하가 죽은 해이기도 하다.
바로크 음악 특히 대위법의 음악은 바하의 작고와 함께 대체로 끝났다고 하겠다.

바로크의 본래의 뜻은 '균형이 잡히지 않은 진주', '찌그러진 보석' 이란 뜻으로서 르네상스의 명쾌한 균형미로부터 떠나 번잡하고 까다로운 세부 기구의 과잉을 표현한 것'이다.
나라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그 공통되는 특성은 전형미에 사로잡히지 않고 형식과 균형을 깨뜨리고 강력한 표현을 중요시하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범위를 좁혀 말한다면 바로크 음악은 17세기경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의 음악을 말하는데 '근대의 화성적인 원칙과 중세의 대위법적 방법이 결합한 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17세기 초엽의 르네상스의 본고장은 이탈리아인데 신진 음악가들이 르네상스 정신에 자극되어 새 양식인 화성적인 반주를 지닌 이른바 단음악(Monodia)을 기용하여 또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기획하는 것이다.
음악상으로는 르네상스의 작품에서부터 로코코(Rococo)양식으로 옮아가는 중산의 것으로서, 숫자 저음(Generalbass 數字低音)이라는 화성의 진행을 저음에 붙인 숫자로 약기(略記)하는 방법의 시대인 것이다.
바로크 음악의 사회적인 기초는 절대주의인 왕권의 제도와 귀족 제도이며 주로 극음악과 기악 음악의 부류인데 이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베니스 나폴리파에서 주력을 두었는데 교회 음악, 오페라, 기악 부문이 모두 발전하여 유럽 전역에 그 힘이 미치게 되었다.

베니스의 성 마르코 교회에서는 59성부의 미사가 연주되었으며 오페라의 근원의 본고장도 이탈리아였다.
오케스트라 내지는 심포니도 그 본거점은 이탈리아의 바로크 시대라고 하겠다.

바로크 음악의 거장 몬테베르디(C.Monteverdi 1567-1643)가 1612년에 베네치아로 이주한 것은 오페라에 의한 본격적인 바로크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페라의 탄생

오페라(Opera)는 바로크 음악시대인 16세기 말에 생겼다.
16세기 말경 이탈리아의 피렌체의 음악 애호가 바르디(G. Bardi 1534-1612)의 집에 신진 음악가와 시인들이 모여 새로운 음악을 연구했는데 이 집단을 카메라타(Camerata)라 불렀다.
그들은 르네상스의 정선에 따라 음악도 고대 그리이스의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대위법을 버리고 단순한 선율에 간소한 화성의 반주를 붙이는 양식을 고안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단음악(Monodia)이며 여기에서 바로크 음악은 시작한다.
이것을 만든 것은 카메라타의 여러 사람들이지만 그것을 가곡으로 쓴 최초의 사람은 갈릴레이(V.Galilei 1520-1591)와 캇치니(G.Caccini 1545경-1618)였다.
1597년에 시인 리눗치니(O. Rinuccini 1563-1621)의 대본에 페리(J.Peri 1561-1633)가 오페라 다프네(Dafne)를 작곡하였다.
이것이 상연된 이래 카메라타의 역사는 오페라의 역사를 출발시키게 된다.
두번째의 작품도 리눗치니의 시에 페리와 캇치니가 작곡한 에우리디체(Euridice)를 1600년에 상연했는데 이 작품을 기점으로 오페라의 확립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페라 사상 결정적인 것은 몬테 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La Favola d'Orfeo)'를 1607년에 상연한 때부터이다.
그는 기악의 서주로 오페라를 시작했으며 댄스 음악이 있고 심포니아라고 하는 기악곡이 사이에 포함되었다.
이로 인해 오페라는 큰 길이 개척되었다.
그리고 A. 스카를랏티(A. Scarlatti 1660~1725)를 중심으로 한 나폴리 악파가 생겼으며 프랑스는 륄리(J. Baptiste Lully 1632∼1686)를 중심으로 프랑스 오페라가 생겼으며 영국과 독일에서도 오페라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오라토리오와 칸타타

1600년대인 바로크 시대에 오라토리오(聖譚曲)가 로마에 등장하였다.
이것은 성서에 의한 소재에 몇 사람의 독창과 합창, 관현악으로 연주하는 서술적인 규모가 큰 가곡이다.
곡은 극적인 구성을 가진 연기나 무대 장치도 없이 연주한다.
따라서 교회 칸타타와 수난곡 (Passion music)과의 한계가 애매함을 볼 수 있다.

오라토리오는 중세 이후 카톨릭 교회에서 상연했던 전례극(典禮劇), 신비극(Mystery) 등에서 생겼는데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 성행하게 되었다.
뛰어난 작곡가로는 17세기 이탈리아의 카릿시미(G. Carissimi 1605∼1674), 17세기 독일의 쉬쯔(H. Schutz 1585∼1672), 그리고 18세기 헨델 (Handel 1685∼1759), 하이든(Haydn F. J. 1732∼1809) 등을 들 수 있다.

칸타타는 17세기 초엽에 단음악의 또 하나의 형식으로 생겨났다.
이는 본래 성악곡을 말했는데 17세기에는 기악 반주가 있는 대규모의 성악곡으로 되었다.
그 내용으로 보아 세속적인 실내 칸타타 혹은 세속 칸타타와 종교적인 내용 또는 전례용으로 된 교회 칸타타가 있다.


악기의 발달

지금까지 합창 만능에서 벗어나 독창 또는 독주적인 음악이 등장하였다.
그것은 건반 악기로서 먼저 줄을 쳐서 소리를 내는 클라비코오드(Klavichord)인데 이는 셈여림이 가능한 것으로서 피아노의 전신이다.
그리고 줄을 튀겨서 소리를 내는 하아프시코오드(Harpsichord)가 있는데 이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쳄발로, 프랑스에서는 클라브생(Clavecin)이라 부르며 이 시기에 사용된 악기였다.
이탈리아와 같은 나라는 기악이 성악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악기는 성악의 편곡을 연주하거나 또는 중창과 합창에 있어서 목소리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던 것이 이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기악의 독립화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바이올린을 만드는 불세출의 제작가들이 출현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바이올린족의 완성은 크레모나(the cremona school 1550~1760경)파의 위대한 제작자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크레모나는 알프스 산맥의 남쪽에 있으며 포 강에 임한 시가로서 세계 최고의 바이올린 제작가가 나온 곳으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아마티(Amati) 가문과 구아르네리(Andrea Guarneri 1626∼1698) 가문에서 훌륭한 명기를 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아마티의 제자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 1644∼1737)의 제품은 300년을 지난 오늘에도 그 성능이 대단하여 아주 귀한 명기로 인정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1700∼1725년대의 그의 작품이 독자적인데 음색이 투명하고 소리가 큰 것으로서는 이를 따를 만한 것이 아직 없다는 것이다.
그는 1500개 가량의 여러 종류의 현악기를 제작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로는 바이올린이 약 540대, 비올라 12대, 첼로가 약 50대 정도이다.
그리고 지우젭페 안토니오(Giuseppe Antonio 1687∼1745)의 작품도 우수한데 파가니니가 쓰던 마술의 바이올린(Wundergeige)도 지우젭페의 작품이다.


기악곡

이 시기에는 또 콘체르토(Concerto 協奏曲)라는 것이 생겼는데 이 말이 16세기 전반에 이탈리아에서 음악 용어로 쓸 때는 성악과 기악의 앙상블(Ensemble)로서 중창 또는 중주라는 뜻으로 통하였다.
17세기 후반부터는 반주가 있는 독주를 의미하는 합주협주곡(Concerto grosso 合奏協奏曲)이 생겼다.
이것은 관현악이 2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연주하는데 극소수의 인원으로 된 독주부인 콘체르티노(Concertino)와 관현악의 집단으로 구분한다.
이 둘이 대화풍으로 서로 응답하면서 연주해 나가는 형식의 음악인 것이다.
소나타(Sonata)는 17세기 말경에 생겼는데 기악 독주, 2중주, 3중주 등에 의해서 연주된다.
처음에 이탈리아의 작곡가들은 푸가 양식의 교회 소나타(Sonata da Chiesa)와 실내 소나타 (Sonata da Camera)로 구분하였으나 17세기에 이 둘이 하나로 합치게 되었다.
협주곡이나 소나타는 2, 또는 3악장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리고 앞서 말한 합주 협주곡은 고전파 시대에 협주곡으로 변화하였다.

모음곡(Suite 組曲)은 몇 개의 곡을 묶어 모은 기악곡이다.
이것 역시 17세기의 산물로서 몇개의 악곡을 같이 모은다는 것은 소나타나 교향곡과 같지만 모음곡은 소나타와 교향곡처럼 상호간의 내면적인 연결이 없고 단지 성격이 다른 곡을 대조시킨 것이다.

관현악(Orchestra)곡으로는 신포니아(Sinfonia)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오페라의 발달과 함께 생겨났으며 처음에는 반주에 끝 역할을 하는 정도였으나 바로크 말기, 나아가서는 고전파 시대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여 교향곡 시대를 이루었다.
오르간곡으로 17세기에 주목할 만한 것은 푸가(Fuga)이다.
이 형식이 점차 완성되어 바하 시대에 이르러서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런데 바로크 음악에 있어서 독일은 같은 시대의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비하면 별로 특색이 없었다.
오페라도 육성되지 못했으며 기악에 있어서도 대위법적인 폴리포니(Polyphony)의 양식으로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대위법과 폴리포니 음악은 9세기경부터 네델란드에서 비롯되어, 이것이 로마 교회의 의식과 결부되어 약 7백년간이나 발전했으므로 그 발달은 이미 귀로 듣기만 해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바로크 말기에 바하와 결정적인 결실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대위법적인 음악의 깊이까지 그 진가를 완성함과 동시에 이탈리아의 바로크와의 융합을 이룬 금자탑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두 거인은 생활에 있어서나 창작면에서나 다른 점이 많았다.
작품면에서 볼 때 헨델은 오라토리오와 오페라에 중점을 두었으며 기악적인 작품에 있어서도 성악적인 요소가 강했다.
그러나 바하는 그와는 달리 성악 작품에 이르기까지 기악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아무튼 그들은 바로크 음악의 최후요 최고의 대가라고 하겠다.

당시 사회적인 배경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십자군의 실패와 상업 자본이 대두하여 르네상스 운동과 종교 개혁의 결과 봉건 세력과 법왕의 권한이 쇠퇴하고 절대 왕권에 의한 사회가 확립된 시대였다.

한편 가톨리에 항거하여 종교 개혁과 절대 왕권의 궁정 문화 등을 배경으로 웅대하고 화려한 바로크 형식에 의한 여러 예술이 유럽 여러 나라에 두루 퍼지게 되었다.
음악의 특징으로서는 대위법적인 다성(多聲) 양식의 완성과 화성 양식이 대두되었으며 숫자 저음에 의한 기보법의 보급을 들 수 있다.
한편 왕후와 귀족 사회에 있어서 세속 음악의 발전과 호화롭고 대규모적인 작품이 나타났다.
따라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여러 나라의 음악이 발달되었고 조성 개념이 명확해졌으며 화성 이론이 현저하게 되었다.
작품에 있어서는 오르간과 하프시코오드에 의한 푸가, 코랄 전주곡, 변주곡, 모음곡, 소나타 등과 실내악에 [솔로 소나타], [트리오 소나타], 주로 바이올린 협주곡인 [솔로 콘체르토], [콘체 르토 그롯소] 서곡과 관현악 모음곡, 서곡의 일종인 신포니아 등이 있다.
극음악으로는 오페라, 오라토리오, 칸타타, 다성적인 가곡과 숫자 저음의 반주가 붙은 가곡이 있었다.
악곡의 형식에 있어서는 아리아나 무곡 등으로 된 A-B-A, 변주곡 형식(변주곡, 파르티타, 샤콘, 팟사칼리아)과 푸가, 옛 스타일의 론도 A-B-A-C-A-D-A 등. 작곡가로는 몬테베르디, 륄리, 코렐리, 퍼어셀, 쿠프랭, 비발디, 텔레만, 라모, J. S. 바하, 헨델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전기 바로크]

(1) 몬테 베르디(C. Monteverdi: 1567∼1643,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의 방향에 기초를 닦고 근대 음악의 방향을 확정. 1606.2. '오르페오' 상연(最古의 Opera)

[작품]오르페오(Orfeo).

(2) 비발디(A. Vivaldi: 1678?∼1741, 이탈리아)

오라토리오, 오페라, 기악곡을 많이 작곡함. (빨강 머리의 사제)

[작품]협주곡 사계(四季).



[후기 바로크]

(1) 바흐(J. S. Bach, 1685∼1750. 독일)

대위법 음악의 완성자로 복음악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그가 지은 오르간 음악과 종교 음악은 특히 훌륭하다. 음악의 아버지.

피아노곡집', '마태 수난곡'.

(2) 헨델(G. F. Handel, 1685∼1759, 독일)

영국에 귀화하여 살면서 귀족 사회에 음악을 보급했다. 그의 음악은 아름다운 가락과 정리된 화성으로 감정적이고 극적인 음악을 작곡했다. 음악의 어머니

'메시아', 모음곡 '수상 음악', '왕궁의 불꽃놀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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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파음악

(The Classical Period : 1750-1820)

 

음악사상(音樂史上) 바흐와 헨델의 시대를 지나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기까지(1827)의 음악. 대체로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에 걸쳐서 오스트리아의 빈(Wien)을 중심으로 화성적 단성 음악이 발달한 시기이다

고전 음악은 흔히 하이든, 모짜르트, 베에토벤의 3거두가 나타나 비인을 중심으로 획기적인 음악을 수립한 때를 말한다.
고전주의 예술은 먼저 문예 분야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그리스와 로마 고전에의 복귀를 목표로 해서 일어난 예술 양식으로서 유형과 조화를 존중하여 객관적인 형식미를 추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고전적이란 라틴어의 Classicus인데 본래의 뜻은 로마 시대의 상류 계급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것이 여러 가지로 변해서 고대품 또는 고대 예술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3인의 거인은 우연하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인과의 관계는 모두 그 전에 있었다.
그 원동력은 오히려 파리와 특히 이탈리아라고 하겠다.
음악에 있어서 고전주의의 완성은 비인과 독일이 중심이었지만 초기의 사정을 보면 왕후와 귀족의 여러 궁정에서 일하던 음악가들의 대부분은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1737년 바하가 라이프찌히에서 합창장으로 활약할 무렵, 바하의 작품이 너무나 대규모적이어서 혼란스럽다고 비난을 하는 이도 있었다.
이것은 바흐에 대한 개인적인 악의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그 시대의 소리를 대변한 것이다.
얼마 후 프랑스의 루소(J. Rousseau 1712-1778)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는데 말하자면 바흐와 같은 대위법에 반대하여 간명하고 명쾌한 것을 바랄 정도로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작품은 민중의 마음을 떠나는 것이라고 했다.

1750년에 바흐가 타계했을 무렵에 새로운 음악이 간소하고 자연스런 형태로 나타났는데 그것이 고전파의 음악이었다.
그것은 잘 정리된 격조 높은 영구적이고 모범적인 것을 말한다.
그같은 의미의 고전 음악이란 어느 시대에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클래식 음악이란 바로크의 복잡한 양식에 반항하여 18세기 중엽에 일어난 간명한 것을 지칭한다.
이 말은 본래 당시 작곡가 자신들이 붙인 말이 아니라 후세에 이르러 낭만주의 음악에 대해 그 이전의 것을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이다.
이는 신흥 시민 계급이 대두하여 각 지방에서 시민 혁명이 일어났으며 민주 사회가 서서히 이룩되던 시대였다.
따라서 이 시대를 움직이던 이념은 계몽 사상이며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사회 문화의 건설을 희망하는 소리가 점차 고조되던 때였다.
그러자 대위법적인 다성 음악은 쇠미해지고 단순 명쾌한 선율을 지닌 화성 양식의 융성을 보게 되었다.
숫자 저음에 의한 당시의 기법은 파기되었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음악이 크게 발전하였다.
성악보다는 기악이 우위로 되었고 소나타 형식과 소나타 구조의 확립을 보았다.

고전파 음악의 진수는 음악 형식으로서는 소나타 형식이며 그것을 응용한 심포니와 실내악이다.
소나타 형식에 있어서는 1746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Wilhelm der Grosse) 의 즉위와 함께 베를린 궁정 악단의 설립을 계기로 활약상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남부 독일의 바이에른의 선거후 카를테오도르(Karl Theodor 1724-1799)가 만하임궁을 중심으로 음악 활동을 하는 등 2개의 거점을 들 수 있다.

만하임 악파(Mannheim School)는 1743-1788년까지 15년 동안의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여기서 는 하이든보다 앞서 소나타 형식의 완성을 보았다고 한다.
고전 음악이 작품으로 나타난 것은 피아노 소나타가 중심이었으며 현악 4중주 등 실내악의 발달을 볼 수 있다.
피아노 협주곡을 위시한 협주곡이 소나타 구조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서곡과 교향곡의 전성을 보였고 소나타 형식에 제시부-발전부-재현부와 론도 형식,A-B-A-C-A, A-A-B-A-C, A-B-A-C-A-B-A 의 형식과 악장 구성의 확립을 보았다.

오페라에 있어서는 오스트리아의 글룩(C. W. Gluck 1714-1787)의 개혁이 있었다.
바로크 시대에 나폴리파에 의해 멜로디 지상주의에 불합리했던 것이 클래식적으로 합리화되어야 했다.
글룩 이전에도 여러 사람들이 오페라에 새로운 시도를 보였는데 우선 오페라 부파(Opera buffa 喜歌劇)가 등장하였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 正歌劇)와는 달리 싱싱하고 간결한 줄거리의 극에 생기에 찬 음악이 붙여져서 그만큼 클래식적이라 하겠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페르골레지(G.B.Pergolesi 1710-1736)에 의해서 대체로 완성되었는데 뒤이어 많은 신인들에 의해 예술적으로 수준 높은 작품을 냈다.

프랑스에서는 1716년에 오페라 코미크(Opera comique)라는 극장이 생겨 희극 오페라를 공연 하여 전통적인 오페라와 대항하였는데 페르골레지에 자극을 받아 경쾌한 오페라를 발표하였다.
그런데 프랑스의 오페라 코미크는 반드시 회극적인 것만 아니라 심각한, 비극적인 것도 이에 속한다.
그것은 그저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면 같이 취급하였다.
이것은 이탈리아 태생이며 프랑스에서 활약한 케루비니(L. Cherubini 1760-1842)가 완성시켰다.
그러므로 그는 프랑스 오페라의 최대의 클래식주의자이다.

독일에서도 대체로 진보의 과정은 비슷하지만 이것은 영국의 작은 노래의 민중적인 오페라 (Ballad Opera)에서 도입된 희국 오페라이다.
독일의 작곡가 페푸쉬(J. C. Pepusch 1667-1752)는 런던으로 가서 활약했는데, 1728년에 초연한 거지 오페라(Beggar's Opera)를 모방하여 독일 사람은 18세기 중경에 노래의 연극이라는 징시피일(Singspiel)을 작곡하였다.
이것은 보통 대화 사이에 간단한 노래를 삽입한 희극적인 내용을 가진 정도의 것이었다.
그 후 글룩은 음악을 종속시키려는 극적인 생명이 있는 오페라로 개혁하였다.
요컨대 고전파 음악의 하나의 특징은 그 당시 귀족들의 살롱을 온상으로 한 궁정 음악이라 하겠다.
따라서 그리스의 예술과 같이 명쾌하고 휘황찬란하며, 호화롭고 균형미를 생명으로 하는 음악이다.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대 바흐의 2남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하(C. P. E. Bach 1714∼1788)와 글룩(C. W. Gluck 1714∼1787), 하이든(F. J. Haydn 1732∼1809), 모짜르트(W. A. Mozart 1756∼ 1791), 베토벤(L. V. Beethoven 1770∼1827) 등을 들 수 있다.

1. 하이든(J. Haydn, 1782∼1809, 오스트리아) : 관현악의 악기 편성을 체계화하였고 교향곡, 실내악, 소나타 등 고전 음악을 완성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이를 확립시켰다. 교향곡의 아버지.
'황제', 교향곡 '놀람', '고별', '시계', '군대' 등
〔 작품〕현악4중주
(참고) 하이든의 특징: 작품이 밝고 즐거워 사람의 마음에 생기를 넣어준다.

2. 모짜르트(W. A. Mozart, 1756∼1791, 오스 트리아) : 35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오페라, 교향곡, 실내악, 협주곡에 이르기까지 1,000여곡에 가까운 작품을 남겼다.
〔작픔〕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마적', '돈 죠 반니', 교향곡 '주피터' 등
(참고)모짜르트의 특징: 하이든에 의해 완성된 고전 형식에 우미한 요소를 넣어 아름다운 예술로 만들었다.

3. 베토벤(I. Van. Beethoven, 1770∼1827, 독일) : 고전파 음악을 가장 높은 경지에 올려놓았으며, 낭만파 음악의 길을 열어 19세기 이후의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작품〕 교향곡 '영웅', '운명', '전원', '합창' 피아노 소나타 '비창', '열정', '월광', 피아노 협주곡 '황제,' 오페라 '피델리오' 등

(참고) 베토벤의 특징 : 소나타 형식의 완성, 교향곡 제 3악장에 스케르쪼 사용 등 체험 고백적인 예술이며 개성이 뚜렷하고 강력한 표현을 하였다.

 

낭만파 음악

(The Romantic Era : 1820 - 1900)

 

고전주의 음악이 형식의 통일과 작품 내용의 완벽을 추구한데 대하여 낭만파 음악은 새로운 시대 사조의 휴머니즘에 의한 인간성의 해방과 자유를 예술창조의 기반으로 하였다.

근대 사상의 흐름에 따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종교의 압박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유로운 생활을 동경했으며 합리주의로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어 마침내 이것은 인문주의로 나타났다.
16, 7세기에 이르러서는 왕권(王權)이 크게 성장되어 절대주의 사상이 지배하게 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극단적인 전체 정치를 지양하고 정치의 합리화를 도모하여 대중의 이익을 중시하여 인망을 얻으려는 계몽적인 전제주의가 일어났다.
18세기에 이르자 옛 사상을 배격하고 정의와 인도를 제창하는 계몽주의가 성행하여 이것은 마침내 자유 민권 운동으로 나타났고 이것이 아나가서는 혁명 사상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과학의 발전에 따라서 산업 혁명에 의한 근대화가 시작되었으며 문화, 경제, 정치,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대립 등,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었다.
또한 이성 만능의 계몽주의에 반대하여 낭만주의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19세기에 이르러 이성적인 계몽주의가 막다른 곳에 이르자 사람들은 미적인 생활과 풍부한 감정의 생활을 흠모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고전주의가 생겼고 뒤이어 낭만주의가 등장하였다.

낭만주의의 흐름은 위대한 철학과 예술을 생산함으로써 화려한 근대 문화를 창조하게 되었다.
음악상의 낭만주의는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문학에서는 1700∼1830년경을 말하고 있으나 음악에서는 18세기말에서 19세기 전체에 걸쳐 일어난 역사적인 현상이다.
낭만주의 음악은 결국 자유주의 음악이다.
산업 혁명으로 인한 강철의 자유로운 공급과 야금술의 발달로 전에 볼 수 없던 악기의 개량과 관악기 등의 새로운 개발을 볼 수 있었다.
피아노의 음역은 1825년에 이르러 7옥타브로 넓어졌으며 금관악기는 현대식으로 개량되었다.

19세기 전반의 초기 낭만주의 음악의 일반적인 특징은 새로운 화음과 화성 진행, 반음계법에 의한 화성양식이 발전하였다.
절대 음악에 대한 표제 음악의 유행과 개인적인 감정이 중요시되었다.
말하자면 낭만 음악이란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어떤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마음대로 표현하는 음악인 것이다.
이 시기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음악이 크게 발전하였으며 소나타의 구조에 구애됨이 없이 악곡의 형식은 다양화되었다.
따라서 연주 기술은 초인간적인 기교가 종횡 하는 기교주의자(virtuoso)의 출현을 보았다.

악곡에 있어서 피아노 음악은 쇼팽과 그 밖의 음악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소품이 많아졌고 고전기와는 달리 보다 기교적이고 화려한 피아노나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많이 작곡하였다.

교향곡에 있어서는 표제적인 경향을 볼 수 있으며 서곡은 연주회용 서곡 등 독립된 관현악곡을 작곡하였다.
오페라에 있어서는 독일과 프랑스의 낭만주의 오페라가 점차 기세를 올리면서 발전 했지만 역시 이탈리아 오페라가 우세했다.
그리고 종교적인 작품은 전에 비해 쇠퇴한 감이 있다.

가곡에 있어서 독일의 예술가곡으로서의 가곡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악곡의 형식과 악곡의 구성에 있어서는 고전 형식의 응용과 변형을 볼 수 있다.
새로운 무곡에 작은 형식이 보급되었는데 예컨대 마주르카, 폴로네이즈, 발라드와 같은 곡이 작곡되었다.
교향적인 형식은 다양화하여 표제적인 교향곡, 교향시, 교향적 모음곡, 연주회용 서 곡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악곡의 통일성과 연대성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어 베를리오즈의 고정 악상(固定樂想)과 리스트의 주제의 변용(變容), 바그너의 지도동기 (Leitmotiv 指導動機), 프랑크의 순환 형식( Cyclic form)을 볼 수 있다.
관현악에서는 표준 편성이 확립되었고 겸하여 그 기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따라서 피아노의 연주 기교도 크게 발달하였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고전파 낭만 음악의 교량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베버, 롯시니, 베를리오즈,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쇼팽, 리스트 등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곡가였다.

19세기 후반에 이르자 여러 후진 국가에서는 혁명에 의한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한편 선진 여러 나라에서는 물질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이 심해져 노동 운동이 여러 나라에서 일어났다.
집중화된 자본과 군사력에 의해 번영을 얻으려는 경향도 강해졌다.
음악 분야에 있어서 19세기 후반 후기 낭만파에 이르자 화성 약식이 극도로 성숙해 져서 조성(調性) 조직에서 이탈하려는 징조를 보였다.

한편 민족주의 음악의 융성과 후진 여러 나라 음악의 성행함을 볼 수 있다.
이는 러시아의 글린카(M. I. Glinka 1804∼1857)를 원조로 하는 러시아의 5인조를 비롯하여 노르웨이, 핀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스페인, 영국 등 많은 나라들이다.
그것은 각기 그 나라의 향토색이 짙은 고유한 특성을 지닌 음악을 창조해 낸 음악 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나라의 민요와 민속 무곡을 발굴하여 거기에 나타난 민족적인 정서가 담긴 민족 고유한 맛을 담은 음악을 창조하려는 것이다.

한편 후기 낭만주의 시대에는 규모가 큰 교향적인 작품과 극음악이 융성을 보였다.
교향곡과 연주회용 서곡에서 발전한 표제 음악으로 된 1악장의 교향시가 창작되었고 교향적인 모음곡이 생겼다.
묘사적인 것과 발레 음악, 오페라 등에 의한 모음곡 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바그너는 글룩의 오페라개혁의 이상을 실현시켜 음악을 극에 종속시키는 이른바 악극(Musik drama 樂劇)을 창안하였다.
그밖에도 오페라에서는 사실주의와 민족주의 적인 경향이 강한 작품이 나타났다.
겸하여 발레(Ballet) 음악도 이 시기의 주목할만한 쟝르의 하나였다.
그리고 예술 가 곡에 있어서는 독일은 물론 프랑스와 러시아 등지에서도 발달하였다.
악기법은 후기 낭만파 음악에 이르러 관현악이 교향적 효과와 색채가 풍부해 졌으 며 독일의 플루트의 명수 뵈엠(T. Bohm 1794∼1881)이 키이 장치를 붙여 플루트를 개량했고 트럼펫이 등장했고 코오넷(Cornet) 등 금관악기에 발브(Valve)가 부착되었다.
그 밖에 색소폰(Saxophone)이 삭스(Adolphe Sax 1814∼1894)에 의해서 발명되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바그너, 베르디, 프랑크, 스메타나, 드보르작, 브람스, 보로딘, 비제, 무소르그스키, 차이코프스키, 그리이크, 마스네, 림스키 코르사코프, 포레, 푸치니 등이 있다.

낭만주의 시대에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사실은 명연주가의 출현이다.
이는 연주 여 행의 가능성이 높아진 결과라고 하겠지만, 파가니니와 리스트 등의 거장을 위시하여 기교주의자들이 속속 나타났다.

낭만주의 음악은 19세기 전체의 음악을 지배하였다.
따라서 19세기 전체의 음악을 지배하였다.
따라서 19세기 음악은 이미 과거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도 이 시기의 음악은 자주 연주, 감상되고 있다.
음악이란 그리스의 신화에 나타난 바와 같이 디오니소스적(Dionysisch)인, 주관적이며, 동적이며, 직관적이고, 감동적인 낭만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아폴론적 (Apollonisch)이며 객관적인 음악 형식과 완성, 그리고 완성에의 예술의 상징이며 고전적인 절대 음악이 있다.
이와 같은 두 스타일의 음악이 예로부터 되풀이해 내려왔던 것이다.
따라서 19세기의 낭만파 음악이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강하게 나타난 시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들 두 개의 스타일은 항상 공존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1. 전기 낭만파 음악 시기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자유주의 사상이 높아져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음악도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고전 음악의 반발로 작곡자의 주관성을 귀중히 여겼으며, 자유로운 사상과 섬세한 감정을 강조하는 운동이 성행해졌다.
감정의 자유로운 표현을 중요시하였다.
융통성 있는 형식의 처리와 소품의 곡이 많아 졌다.
서민을 위한 음악, 세속적인 음악이 많아졌다.
문학, 미술, 연극 등 자매 예술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표현법이 구사되고 예술의 내용을 암시 하거나 묘사하는 음악이 많이 작곡되었다.

2. 후기 낭만파 음악 시기

19세기 후반은 낭만파 음악의 황금 시대로 개성적이며 주관적인 음악 예술이 확립된 시기이다.
표제 음악의 발달, 교향시, 악극(Music Drama) 이 창시되었다.
관현악(Orchestra)이 발달되었다.
오페라의 전성기이다.
무조적(無調的)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참고)표제음악 : 곡의 내용을 암시하는 제목과 대략의 줄거리가 설명되어 있어 문학적, 회화적 (繪畵的), 극적 내용을 암시하려는 음악으로서 절대음악과 구별된다.

(1) 전기 낭만파 음악가

1) 베버(C. M. V. Weber : 1786∼1826, 독일) : 낭만파 음악의 개척자로 극음악에 크게 공헌하였다. 극장에 근무하는 아버지에게 태어난 그는 가극에 흥미를 가지고 14세때부터 작곡하여 35 세에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작곡하였다.
〔작품〕오페라 '마탄의 사수', '무도회의 권유' 등

(참고) 베버의 음악사상의 가치

1. 낭만의 국민적 오페라를 완성.
2. 근대 지휘법의 기초를 만듬(본격적으로 지휘 봉을 채용함)
3. 표제음악의 싹을 트게 함(무도회의 권유)

2) 슈베르트(F. P. Schubert: 1797∼1828, 오스트 리아) : 시, 가락, 반주가 일체된 예술성이 풍부한 가곡을 작곡하였다. 가장 어려운 환경 속에서 가난과 배고픔까지 참아가면서 작곡하였던 슈베르트는 가곡의 천재이다.
시를 대하면 즉석에서 작곡 할 수 있었다. 가곡의 왕.
〔작품〕가곡집: '겨울 나그네', '아름다운 물방 앗간 아가씨', '백조의 노래' 등

3) 멘델스존(J. L. F. Mendelssohn: 1809∼1847, 독일): 무언가의 창시자이며, 밝고 아름다운 기풍이 넘친다.
매우 전통있고 재력있는 집에서 태어난 그는 음악가들 중에서 가장 행복하게 여생을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다.
조부는 철학자요, 부친은 은행가였다.
〔작품〕바이올린 협주곡 '마단조', 극음악:' 한 여름밤의 꿈', 피아노곡: '무언가집' 등

4) 쇼팽(F. F. Chopin : 1810∼1849, 폴란드): 시적 감정이 넘치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대부분이 피아노곡이다.
피아노의 온갖 가능성을 최대로 발굴한 피아노의 시인.
〔작품〕피아노곡 '즉흥 환상곡', '군대 폴로네 에즈', '야상곡', 피아노 협주곡1.2 번 등

5) 슈만(R. A. Schumann: 1810∼1856, 독일) : 그의 음악은 문학적인 깊은 내용을 지니고 사랑의 전부를 노래했다.
부인 '클라라'와의 사랑 은 유명하다.
〔작품〕'어린이 정경', 가곡집: '여인의 사랑과 생애'. '시인의 사랑' 등

(2) 후기 낭만파 시기

1) 베를리오즈(L. H. Berlioz : 1803∼1869, 프랑스) : '관현악의 왕'이라고도 하며, 표제 음악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프랑스 낭만음악가 중의 독보적인 존재.
〔작품〕'환상 교향곡', 서곡'로마의 사육제' 등

2) 리스트(F. Liszt : 1811∼1886, 헝가리) : '교향시'라는 자유로운 형식의 표제 음악의 창시자이다. 피아노의 왕. 〔작품〕피아노곡 '헝가리 광시곡', 교향곡' 파 우스트' 등

3) 바그너(W. R. Wagner : 1813∼1883, 독일) : '악극'이라는 오페라를 창시하였다.
"바하 이후 에 태어난 사람으로 바하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듯이 바그너 이후에 출생한 사람으로 바그너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작품〕오페라 '탄호이저', '로엔그린', 악극 '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

4) 베르디(G. F. F. Verdi: 1813∼1901, 이탈리아) : 이탈리아 오페라를 세계적인 경지로 이끌어 올렸다.
〔작품〕오페라 '일트로바토레',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아이다' 등

5) 구노(C. Gounod : 1818∼1893, 프랑스) : 화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남. 종교 음악을 많이 지음. 자칭 '신부 구노' 라 칭할 정도로 승직과 음악 사이에서 갈등함.
구노는 리스트와 함께 열렬한 가톨릭 신자인 동시에 감각주의자다.
[작품] 오페라 '파우스트', '로미오와 줄리엣. 아베 마리아(Ave Maria)

6) 브람스(J. Brahms : 1833∼1897, 독일) : 신고전악파로 불릴 만큼 절대 음악에 힘을 기울인 작곡가이다.
독일의 3B : Bach, Beethoven, Brahms.
〔작품〕'대학 축전 서곡', '헝가리 춤곡' ,바이 올린 협주곡 등

7) 차이코프스키(P. I. Tschaikowsky : 1840∼ 1893, 러시아) : 러시아 음악과 유럽 음악을 절충한 러시아의 낭만파 음악가. 법률을 공부하고 법무성에서 근무하다가 사임했었으며 국민 음악적 요소도 갖추었다. 〔작품〕교향곡: '비창', 발레곡: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등

8) 푸치니(G. Puccini : 1858∼1924, 이탈리아) :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극적이고 박력있는 오페라를 작곡하여 근대 오페라의 금자탑을 쌓았다.
[작품] 오페라: '라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 투란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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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악파 음악(Nationalism Music)

 

19세기에 보헤미아·러시아·북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국민주의적 음악운동. 1848년 프랑스 2월혁명 이후 그 영향을 받아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오던 나라들 사이에 독립운동이 성행하고 그것이 음악상의 운동으로 나타난 것을 말한다.

러시아에서는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저지하려던 제정(帝政)의 탄압정책에 반대하는 운동형식으로 나타났다.

국민악파의 음악적인 특징의 하나는 독일·오스트리아의 기악과 이탈리아 오페라의 지배적인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나라의 민족적 특색을 예술음악 속에 살리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 있었던 보헤미아에서는 B.스메타나가 민족적인 제재에 의한 오페라와 교향시를 작곡하여 국민악파의 기반을 굳히고, 이어서 A.드보르자크도 민족적 색채가 짙은 교향악과 실내악곡 등을 작곡하였다. 헝가리에서는 에르켈이 이탈리아 오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 참다운 헝가리적인 국민 오페라를 썼으며, 폴란드에서는 모뉴시코가 많은 민족적인 오페라를 남겼다.

F.리스트와 F.F.쇼팽은 주로 국외에서 활약하였기 때문에 보통 국민 악파에 포함되지 않는다. 러시아에서는 글린카가 국민주의적인 음악의 선구자로 불리고 있으며, 발라키레프, 큐이, 무소르크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보로딘 등 소위 5인조가 국민 악파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꼽힌다. 이 밖에 북유럽에서는 덴마크의 게제, 노르웨이의 그리그 등이 민족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썼다.

1. 드보르작(A. Dvorak : 1841∼1904, 보히미아) : 민족적 색채가 짙은 보헤미아 민요조의 음악을 작곡하였다.
보헤미아 국민음악의 대표자이며 그의 음악에는 낭만적 향기가 높고 밑바닥에는 끊임없이 슬라브 민족의 혼이 흐르고 있다.
〔작품〕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현악4중주 : '아메리카', 무곡: '슬라브 무곡' 등

2. 그리이크(E. H. Grieg : 1843∼1907, 노르웨이) : 아름다운 자연을 향토색 짙은 음악으로 나타낸 작곡가.
노르웨이 국민음악의 대표자이며 노르웨이에서 국민음악으로 민족 정신을 고취시킨 최초의 음악가이다.
〔작품〕모음곡 : '페르귄트', 피아노 협주곡: ' 가단조' 등

3. 시벨리우스(J. Sibelius : 1865∼1957, 핀란드) : 핀란드 국민 음악의 창설자인 그는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이다.
비인에서 작곡법을 배웠으며 20세기를 대표 할만한 훌륭한 곡을 지었다.
〔작품〕교향시 : '핀란디아', '투오넬라의 백조', '타피욜라' 등

4. 무소르크스키(M. P. Mussorgsky : 1839∼ 1881, 러시아) : 러시아 5인조(보로딘, 큐이, 발라키레프,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중의 한 사람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있으면서 작품을 썼다.
프랑스 인상파에 영향을 줄 정도로 러시아 국민성을 강하게 나타내는 개성적인 작품이 많이 있다.
[작품] 교향시 : '벌거숭이 산에서의 하룻밤',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 가곡: '벼룩의 노래'.

5. 림스키 코르사코프(N. A. Rimsky Korsakov : 1844∼1908, 러시아) : 러시아 5인조 중의 한 사람.음악에 재질을 가지고 있어 9세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였으며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고 해군 군악대에 있으 면서 수많은 곡을 지어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가공적인 민요풍의 제재를 많이 사용한 작곡가.
[작품] 모음곡 : '세헤라자데', 스페인 기상곡 (Capriccio Espagn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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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 현대음악

(The Twentieth - Century : 1900 - 2000)

 

19세기 말, 낭만파 음악이 최고도에 이르렀을 무렵, 반 낭만파 운동이 일어나 새로운 양상의 음악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사이의 음악을 근대 음악이라 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비정서적, 부조화적, 충격적인 양상을 짙게 나타내기 시작한 음악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진행되거나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여러 형태의 음악을 통틀어 현대음악이라 한다.

근대, 현대 음악은 이미 낭만파 음악의 형태를 벗어나 인상주의, 표현주의, 무조 음악, 12음 음악의 흐름으로 변화되어 왔으며 새로운 음악의 소재를 추구하는 구체 음악, 전자 음악 및 예술의 극단을 달리는 전위 음악도 등장한 가운데 많은 작곡가들이 서양 음악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동양 음악을 연구하고 있으며, 이것을 기초로 작곡에 힘쓰고 있다.

현대 음악은 반(反) 바그너주의, 반(反) 주관주의로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20세기는 음악사상 17세기 이래로 하나의 큰 전환기로 보아야 했다.
이는 비단 악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모든 예술, 과학과 사회사조, 나아가서는 사회 구조와 인류의 생활 상태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전환기를 갖게 된 것이다.
음악 양식의 변천이란 인간의 생활 의식과 사고 방식의 변천이 음악상에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작곡자, 연주자, 청중의 관계 형식의 변화 등에 많은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흔히 1890년부터 제1차 대전이 끝난 1918년까지의 음악을 근대 음악이라고 부른다.
1890년경을 낭만주의 음악의 해체로 보고 있는데 그 후 그의 유산을 풍부하게 받으 면서 또는 그 반동으로 새 양식이 대두하게 되었다.
1850년 이후 리스트와 바그너의 작품에서는 조성(Tonality 調性)이 더욱 애매해져 갔다.
이 시기의 작곡가들은 장조, 단조 이외의 음계를 사용하거나 반음계를 많이 포함한 무조적인 작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사회적으로 큰 변혁을 가져왔다.
객관적인 순수한 음의 움직임으로서의 음악을 재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객관적이어야 하며 때로는 기계적이고 화성적인 것보다는 대위법적이며 화음은 불협화음적이고 충격적이었다.
오케스트라의 편성은 소규모적이며 실내악을 중시하였고 절대 음악으로의 복귀의 경향인 형식성과 명쾌한 리듬 등을 들 수 있다.
현대 음악이란 시기와 함께 변하는 것이므로 어느 시기를 꼬집어 확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현대 음악을 제1차 대전 이후의 것으로 말하는 이도 있고 그 범위를 좁혀 1945년 이후의 음악을 현대 음악으로 보는 이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 범위를 넓혀 20세기의 음악을 현대 음악으로 취급한다.

당시 사회적인 배경은 세계의 교류가 활발하게 되자 영토와 민족 문제를 둘러싸고 나라 사이에 이해가 대립하여 대전이 일어나 여러 나라들의 변동이 많이 생겼다.
원자 시대가 되자 새로운 문명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현대 음악의 하나의 특징으로서 조성과 화성을 비롯하여 멜로디와 리듬에 대한 새로운 사고 방식이 대두되었으며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위법과 같은 옛 시대의 양식의 부활을 보았다.
새로운 음향 발생의 장치로 구체 음악, 전자 음악 등 전위적인 음악이 나타났다.
겸하여 악보와 레코드, 라디오, TV 등의 발달과 보급으로 새로운 음악이 전 세계를 통해 순식간에 보급하는 등 질량이 모두 증대되었다.
창작면에 있어서는 방대한 오케스트라보다는 신고전주의적인 경향과 발맞추어 각종 중주(重奏)곡과 소편성의 합주곡이 관심을 보였다.
오페라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오페라는 물론, 뮤지컬(Musical)이 생겼고 발레와 함께 영화 음악에서도 새로운 양상을 볼 수 있다.
형식에 있어서는 기성 형식의 응용과 변형, 나아가서는 그 부활을 볼 수 있으며 새로운 음소재로써 구성법이 대두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악기 편성이 탐구되었고 새로운 음향 장치에 의한 시도를 거듭하고 있다.



1890∼1918년 사이의 음악

1850년 이후의 후기 낭만파에서 보여준 조성의 애매함은 물론 무조적인 수법에의 접근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문학과 회화 등 자매 예술과의 영향도 많이 나타났다.

인상주의(Impressionism 印象主義)

프랑스의 드뷔시가 창안한 인상파 음악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엽, 제1차 대전까지에 걸쳐 일어났다.
이는 낭만주의에서 현대에 이르는 가장 주요한 전환점을 이룬 악파이다.
이 음악은 프랑스 인상파의 회화와 상징 문학에서 영향을 받아 나타났다.
자연계의 여러 가지의 현상, 즉 곧 소실하든가 쉴새 없이 변화하는 외계로부터의 자극에 대해서 예술가가 받은 순간적인 생기에 찬 감음이며 응답이다.
그러므로 인상이란 외계의 묘사가 아니라 한 번 마음에 자극된 내적인 인상을 결국은 주관적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음악의 다이내믹한 감동보다는 음빛깔, 뉘앙스의 미묘한 변화를 표현한다.
기법적으로는 화음 진행이 색채적이다.
그의 수법이 중심이 되는 것은 항상 변화하는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표현하기 위하여 빛깔을 조색판(調色板)에 혼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각 작용을 이용한다는 데서 빛깔 그대로를 화면에 칠하여 현실 그대로의 밝음을 재현시킨다는 것이다.

드뷔시는 1892년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 1842∼1898)의 상징시에 작곡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으로 지금까지의 작곡법을 떠나 인상주의 수법을 확립시켰다.

원시주의(Primitivism) 음악

미개 민족과 원시 민족의 소박하고 야성적인 음악을 소재로 한 음악이다.
19세기 말경, 이국적인 제재를 음악에 도입하여 새로운 것을 표현하려고 했다.
원시주의의 경향은 유럽의 자본주의의 부정에서 오는 동양에 대한 동경을 표시한 데 기인한 것이다.
문화적으로 찬란한 당시 유럽의 시민 계급의 존재에 대한 불안과 생활에의 권태 등에서 이국적인 소재를 희구한 것이다.

여러 음악가 중에서도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3대 발레인 '불새(L' oiseau de Feu)', ' 페트루시카(Petrushka)',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 등을 작곡했는데 이 곡들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원시 음악은 현대 음악에 지나치게 세련된 추상미의 연약한 음악에 대해서 원시 예술의 힘찬 원기를 되찾아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음악이라 하겠다.

표현주의(expressionism)

인상주의와의 대립으로서 회화에서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이다.
예술가의 내면적인 생활에 나타나는 것을 밖으로 내 보내어 창조하는 주관적인 표현이다.
제1차 대전 전의 긴박한 불안의 공기에서 세기말적인 절망, 격동과 절규, 이상한 사실적인 것을 강렬하게 표현하려 하였다.
멜로디는 무조(Atonality 無調)이고 화성은 불협화음을 사용했다.
이는 추상 세계라고 할만한 12음 기법에 이르는 과도기에 있어서의 표현주의로 간주할 수 있다.
인상주의가 프랑스를 중심한데 반해서 표현주의는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는 특히 쇤베르크를 위시한 작곡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작품으로는 쇤베르크의 멜로드라마 '달의 피에로'와 교향시곡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를 들 수 있다.

1918∼1945년 사이의 음악

1890∼1918년 사이, 즉 제1차 세계대전까지를 후기 낭만파 음악 시대라 부르는 것 처럼 1918∼1945년까지의 양차 대전의 기간은 신고전 시대라 할 수 있다.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新古典主義)

이 음악은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의 음악을 넓은 의미에서 보통 신고전주의 음악이라 한다.
이 시기의 음악은 낭만주의 음악에서 현대 음악에 이르는 과도기이기도 한다.
신고전주의는 후기 낭만주의 음악의 지나친 주정(主情)성과 표제 음악적인 경향에의 반발로서 제1차 대전 후의 작곡가들의 경향이다.
이 음악은 고전 음악과 같이 간결한 형식미에의 복귀를 주장하였다.
주관적인 정서의 과잉이라든가 방대한 관현악의 편성, 혹은 반음계의 남용, 표제적인 내용 등에 대한 반 낭만적 또는 인상주의와 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객관적인 음악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스트라빈스키라고 하겠는데 부조니, 사티 등에 의해서 프랑스를 중심해 일어났다.
바르토크는 민족 음악을 바탕으로 하는 음악어법으로서 지금까지 볼 수 없던 새로운 음악을 창조했다.
말하자면 그는 민족적 신고전주의 작곡가로 간주할 수 있다.

12음 주의(Dodacaphonism)

12음 기법으로 작곡한 음악을 12음 음악이라 한다.
이는 쇤베르크가 종래의 조성 음악에서 벗어나 무조성의 체계화를 시도하여 창조하였다.
이 기법은 1옥타브 안에 있는 12의 서로 다른 음을 1회씩 일정한 순서에 따라 사용한다.
여기서 세리(Serie) 라고 하는 음렬(Tonreihe 音列)을 만들어 이 세리를 여러 가지로 조작하여 음악을 만드는 방법이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전통 음악의 음조직을 해체하고 12개의 음을 모두 평등한 가치로서 독립시켜 새로운 음의 표현을 시도한 것이다.
따라서 장대한 곡에 이 기법을 사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으며 음을 중복해서 만드는 기능 화성(Functional harmony)적인 성격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선적인 대위법의 수법을 사용하기 마련이다.
이 음악은 쇤베르크의 제자, 베베른과 베르크에 의해서 계승되었고 제2차 대전 후 세계 여러 나라에 보급되었으며 더욱 새로운 발전을 보였다.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 新卽物主義)

제1차 대전과 제2차 대전 사이에 일어난 독일의 예술 사조이다.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을 철저히 하려 하였다.
이같은 점에서는 신고전주의와 같은 경향인데 독일의 주관적인 표현주의에의 강한 반동으로 생긴 것이다.
신즉물주의란 본래 미술 용어 로서 주로 독일에서 일어난 예술상의 사조이다.
신즉물주의 문학에는 표현주의의 흥분성을 제거해 버리고 건강하고 명확하게 현실에 부합하도록 사물의 핵심을 보고 또한 파악해가려는 것이다.
이 음악은 힌데미트, 바일 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 Realism)

19세기 러시아 음악은 5인조 등의 작곡가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유럽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이래로 러시아는 세계 민족 음악 운동의 선구자 내지는 추진력이 되어 왔다.
1917년의 혁명을 계기로 1920년경에는 예술에 있어서도 혁명적인 것, 또는 전위적인 것이 용인되었다.
1928년, 제1차 5개년 계획을 계기로 하여 예술 부문에까지 이데올로기의 강화가 시작되었다.
1930년에 '혁명에 있어서는 민족적, 내용에 있어서는 사회주의적'이라는 슬로우건을 내걸었고 1934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선언했던 것이다.
그 후 당시의 정치적 요 청에 따라 서구적인 모더니즘을 깨끗이 털어 없앰으로써 작곡 양식은 19세기로 되돌아간 감이 있다.
사회주의적 창조 방법을 추구하는 이 음악은 개인주의적 형식주의에 의해서 행하여진 대중과 예술의 분열을 없애고서 개성적인 창조 활동을 사회에 재통합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이념을 고도의 기술을 통해 간결 명랑하고 진실한 표현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적 예술 창조의 방법이기도 하다.

1945년 이후의 음악

제2차 대전이 1945년에 끝나자 지금까지 폐쇄되었던 국제적인 문화 교류의 길은 다시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제대로 궤도에 올라 새로운 양식이 나타나기는 1950년대에 가서야 비로소 가능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에는 반낭만적인 사조가 강한데 비해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예컨대 메시앙과 같이 르네상스와 중세기의 기교의 부활을 꾀하는 작곡가도 있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는 전혀 새로운 영역으로 개척해 나가려는 경향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여기서는 세대의 교체가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뮈지크 콩크레트(Musique concrete 구체음악)

이 음악은 제2차 대전 후 1948년에 프랑스의 파리 방송국의 기사 셰페르(Pierre Shaefer 1910~ )에 의해서 창시된 것으로서 새로운 표현 방법이다.
그 특징은 현실에 구체적으로 존재해 있는 음향을 자기(磁氣) 녹음 테이프에 녹음하여 그 음향을 중복하든가 녹음기의 회전 속도를 바꾸어 가며 음질을 변화시키면서 구성하는 음악이다.
이것은 처음에 레코드로 만들어졌으나 얼마 후에는 테이프 레코드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것은 악보와 연주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데 그것은 전자 음악과 공통되는 점이다.
그런데 음악은 악음(樂音)으로 구성한다는 본질에서 본다면 이는 반음악적 이라 하겠다.
셰페르는 '철도의 에튀드', '멕시코의 피리'를 1952년 블레즈는 '에튀드 Ⅰ Ⅱ', 메시 앙은 '음색=지속' 등의 작품을 썼고 1954년 바레즈는 '사막'을 작곡하였다.

전자 음악(Elektronische Musik 電子音樂)

이 음악은 1950년부터 킐른 방송국에서 실험을 시작하여 1953년에 12음 음악의 이론가 아이메르트(H. Eimert 1897~ )박사의 지도하에 연구된 것으로서 전기 발전 장치에서 발생한 음향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합성시켜 녹음 테이프에 녹음, 편집하 여 구성한 음악이다.
구체 음악이 자연음을 사용한데 반해서 전자 음악은 전자음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 데 전자 음악의 표현 영역은 대단히 넓어서 악기로서는 따를 수 없는 빠른 템포와 정밀한 리듬, 그리고 미묘한 음향 등을 가지고 있다.
시톡하우젠이 1956년에 작곡한 전자 음악 '소년의 노래'는 유명하다

우연성의 음악(Music of chance operation 偶然性)

이 음악은 불확정성(不確定性) 음악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통하고 있는데 미국의 존 케이지(John Cage 1912∼ )의 사상의 실천, 나아가서는 그와 같은 동료들간에 맺어진 용어로서 광범위한 내용에 그 한계는 애매한 점이 없지 않다.
그는 조성에서 탈피하려면 음 그 자체부터 변혁해야 한다면서 12음 음악과 무조 음악에서 떠나 주로 타악기를 위해 썼으며 타악기만으로 앙상블을 조직하였다.
그는 독자적인 음향 소재로 된 프리페어드 피아노(prepared piano)를 사용하였다.
이 피 아노는 여러 가지 금속, 나무, 대나무, 고무, 유리, 그 밖의 물체를 피아노의 줄에 접속시켜 음질, 음의 높이 등에 변화를 주어 독특한 음색과 타악기적인 효과를 노 린 것이다.

1954년의 피아노곡 '4분 33초'에서는 피아니스트가 악기 앞에 앉은 채로 아무 연주도 하지 않고 그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다가 시간이 지나면 퇴장한다.

말하자면 그 시간에 들려 오는 잡음이라든가 듣고 있는 자신의 숨소리, 고동 소리 그 모두가 다 음악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뮈지크 세리엘(Musique Serielle)이 너무나 치밀한 작곡법에 대한 반발 등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예컨대 관현악의 어떤 파트에 대해서 대략 지시만을 줄 뿐 연주자가 어떤 범위 안에서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작곡법이 오늘에 와서는 일반화 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음악은 감각적이고 비정적(非情的)이며 때로는 자극적인 것이다.
이는 대전 이후 계속되는 세계의 정치적 위기라든가 인간들의 존재에 대한 불안 같은 데 기인하여 나타난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근대와 현대의 저명한 작곡가를 대략 다음과 같이 적어 본다.
볼프, 드뷔시, R. 시트라우스, 뒤카스, 쇤베르크, 라벨, 레스피기, 바르토크, 스트라빈 스키, 프로코피에프, 오네게르, 힌데미트, 졸리메, 메시앙, 쇼스타코비치 등 많은 작 곡가들이 있다. 

 

NP.Bamo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