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사는 음악의 기원으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연구됩니다. 이러한 시대적 구분은 음악의 시대적 특징으로 한정되는 고유한 명칭에 의한 분류가 아니라 일반 역사나, 건축, 미술 등에서 사용되는 명칭을 인용하고 있어요. 고대,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 낭만, 20세기 등이 그러한 명칭들인데 시대적 분류를 위한 이런 명칭들은 초기, 중기, 후기 등으로 세분되기도 합니다. 각 시대를 구분짓는 기준은 음악에 있어서 특정한 양식의 출현으로 정해지므로 각 시대는 그 시대마다 고유한 음악양식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양식이 갑자기 어느 한순간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랍니다. 대체적으로 어느 한 시대가 끝나기 전에 새로운 양식이 나타나서 옛 양식과 함께 진행되다가 옛 양식은 점차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각 시대의 시작과 끝남을 정해주는 시기의 연대나, 그 시대의 음악양식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명칭들은 음악가에 따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시대의 명칭과 연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선사시대 ~ 200년 |
| 200년 ~ 1450년 |
| 1450년 ~ 1600년 |
| 1600년 ~ 1750년 |
| 1750년 ~ 1810년 |
| 1810년 ~ 1900년 |
| 1900년 ~ |
그럼 이제 한 시대 씩 자세히 알아볼까요? 먼저 고대 음악부터 출발합니다! 위의 각 시대를 클릭하시면 그 시대를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등에서 이미 상당히 고도로 발달한 음악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의 그림이나 조각·기록·전승(傳承)·악기 등으로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단지 음악작품 그 자체는 한 곡도 남아 있지 않아 그 음악의 연구는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추정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고대 유대의 음악에 대해서는 성서에도 많은 기록이 있어 유대교의 제사와 음악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시편(詩篇)》도 성가의 가사(歌詞)로서 본래는 일정한 선율에 따라서 노래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었죠. 오늘날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유대교도들 사이에는 각기 독자적인 시편창법(詩篇唱法)·성서낭창법(聖書朗唱法)·성가 등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그 가운데는 고대적인 요소를 남기고 있는 부분이 적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와 그리스도교 성가와의 관련에 대해서도 여러 각도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음악은 사회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찬가·무도가·결혼가·조가(弔歌) 등 여러 종류의 가곡이 쓰여졌다. 호메로스, 사포, 아나크레온 등의 시(詩)도 본래는 낭창을 위한 가사였으며,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파네스 등의 고대극도 무대 출연자나 코러스(chorus)에 의한 낭창, 기악연주자에 의한 반주 등에 의해서 연주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17세기 초 근대 오페라의 탄생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또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등은 각기 음악의 본질·윤리성·물리성에 대해 논하여 음조직·선법(旋法)·리듬 등에 관한 그리스의 독특한 음악이론을 확립해 그 후의 유럽 음악이론의 발전에도 중요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하네요.
서양 음악과 우리나라 음악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요? 서양 음악은 우리나라 음악에 비하여 훨씬 화음이 다양합니다. 서양 음악의 역사는 바로 다성음악의 발달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서양 음악의 최초의 형태는 역시 하나의 선율로 이루어진 단선율 이었습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클래식 음악이란 모두 여러 개의 성부를 가진 음악이기 때문에 처음 대하는 감상자들은 서양 음악이 원래 여러 성부를 가진 음악(다성음악)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음악도 처음에는 하나의 선율로만 이루어진 단선율의 음악이었고 여러 가지 발전을 거쳐 오늘날의 형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단선률이 복선률로 바뀌게 된 첫 시기가 바로 9세기 중엽입니다. 따라서 약 9세기 중엽까지는 단선율이 지배하던 시대였지요. 이렇게 단선율이 지배하던 시대를 로마네스크 시대라고 합니다. 서양 역사에서 중세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문화의 암흑기라고 하지요? 모든 문화는 종교에 구속되었지요. 음악도 예외는 아닙니다. 로마네스크 시대의 단선률 음악은 교회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그래서 가사도 종교적 성격을 띤 라틴어로 되어 있으며, 물질숭배 사상을 배제하던 교회에서는 물질로 만들어진 악기 같은 것은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사 붙은 성악음악만이 존재하였습니다. (그것도 여성 성악은 허락되지 않았고 남자 신부만의 목소리로 된 성악 음악만 있었다고 해요.. ) 이렇게 이 시대에는 음악의 존재 이유를 심미적 가치에서 찾았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앙적 가치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음악 그 자체보다는 교회의 예배의식이 더 중요했으며, 의식의 필요부분에 사용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단선율 음악의 대표적인 예로는 가장 중요시되며 또한 오늘날까지 자주 사용되는 그레고리안 성가(Gregorian chant)가 있습니다. 그레고리안 성가의 음악적 특징은 앞서 말했듯이 하나의 선율로 이루어진 단선율 음악이이고 가사면에서 본다면 모두 라틴어로 쓰여져 있지만, 성서적 가사를 갖는 것과 비성서적 가사를 갖는 것으로 구분되며, 정확한 박자와 마디의 표시가 없어서 길게 낭송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문화가 종교에 예속되었던 중세 시대에도 종교 음악 이외의 음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런 종교 음악 이외의 것을 넓은 의미에서 세속 음악이라 할 수 있지요. 신분이 높은 귀족 중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었고, 자작의 시에 노래를 즉흥적으로 불렀습니다. 그들은 여러 곳의 왕궁과 귀족의 저택을 방문하여 간단한 악기의 반주로 그것을 노래했습니다. 한편, 교회 음악에서는 새로운 기보법, 즉 악보를 그리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기보법이 5선보로서 복잡한 것도 바르게 기록하고 표현하기도 쉽지만 이것이 완성되기까지는 천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고 하네요.
1450년부터 1600년대에 이르는 시기를 음악사적 '르네상스'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중세 말에 대한 '고딕'이나 다음에서 언급될 '바로크'와 같이 미술의 역사에서 빌려온 용어입니다. 이 말의 문자대로의 의미는 '재탄생'으로서, 고대 문화의 부흥을 뜻하는 말이었어요. 미술등 문예의 경우에는 많은 부활을 보였지만 음악에서는 이와 같은 의미의 '재탄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르네상스는 인간정신의 재탄생으로서 인본주의적 예술창작태도, 조화 및 비례의 중시, 합리적인 기법의 탐구, 명확한 표현 등이 그 중심 내용이므로 음악에서의 이런 양식상의 특징이 확연히 나타나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즉, 음연이 현저히 넓어지고, 새로운 음공간이 개척된 것은 회화에 있어서 원근법과 비길 수 있으며, 악보 인쇄술의 발명과, 정량 기보법의 보급은 르네상스의 과학정신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지요. 이 시기에 있어서 음악은 그 어떤 시기보다도 많은 음악이 작곡되고 연주되어 음악가들은 전보다 높은 명성을 얻었으며, 마침내 '위대한 작곡가'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또한 음악에 관한 새로운 종류의 이론 서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르네상스 기간에 있어서 음악의 성장에 가장 큰 공로 중 하나는 바로 음악 인쇄의 시작일 것이다. 또한 16세기 초에는 음악을 작곡하는 방법에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즉 지금까지는 한 성부씩 작곡하여 왔으나 여러 성부를 하나의 전체로서 동시에 생각해 내고 쓰기 시작하여 총보(SCORE)를 사용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음악
14세기 초엽의 최초의 신음악이라고 불리우는 아르스 노바(중세 시대)의 탄생이후 두번째의 신음악이 탄생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크(Baroque) 음악입니다. 16세기의 르네상스음악에 이어 17∼18세기 전반에는 바로크음악이 전개되었다. 이 시대 미술작품에서의 바로크양식에 대응한다. 바로크라는 말은 '불규칙적인 모형'을 뜻하는 포르투칼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 말은 비정상적인, 기교만 과장된, 감각이 나쁜, 괴상한 등의 헐뜯는 뜻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음악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다만 이전 시대의 음악과 견주어 볼 때 새로운 양식이 그들에게 생소하게 보여졌을 것이라는 의미로 바로크를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크음악은 주로 극음악과 기악음악 분야에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유럽에서 발전하였는데 극음악 가운데서도 가장 비중이 큰 것은 오페라입니다. 극과 음악을 결합하려는 시도는 그 이전부터 이루어졌으나 16세기말의 피렌체의G. 카치니, J. 페리 등이 당시의 인문주의 이념에 입각, 고대 그리스극의 재흥을 꾀하여 서창풍의 모노디양식을 창시해서 근대 오페라의 방향을 잡았고, 그 후 몬테베르디의 작품은 이를 더욱 발전 시켰습니다. 1637년에는 베네치아에 공개 오페라극장이 개설되어 삽시간에 유럽 전역에 오페라가 퍼지게 되었죠.. A. 체스티, A. 스트라델라, A. 스카를라티, 18세기의 페르골레시, 요멜리 등의 공헌에 힘입어 초기의 모노디양식은 근대 오페라형태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또한 오페라의 깊은 영향을 받고 종교적인 제재(題材)에 의한 극음악·오라토리오·수난곡등도 작곡되어 G. 카리시미 등의 작품을 낳았고 극음악의 이념을 실내악적인 방향으로 추구한 칸타타에도 볼 만한 작품이 많았답니다. 한편 기악음악의 분야에서도 이탈리아의 주도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요. 오르간음악의 프레스코발디, 현악기를 중심으로 한 기악합주곡분야의 비탈리, 토렐리, 코렐리, 비발디, 독주 크라비아에서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등의 작품은 종래의 성악양식에 의한 작곡법을 완전히 청산하고 기악 독자적인 이념을 추구하여 토카타·푸가·소나타 콘체르트 등의 기악형식을 확립하였고, 또한 장·단조에 의한 기능화성법의 바탕을 이루었습니다. 17∼18세기의 이탈리아 출신의 음악가들은 전유럽의 악단에서 활약하여 이탈리아음악이 곧바로 국제음악으로 통용되었는데, 프랑스·영국·독일 등도 각기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음악을 전개하여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프랑스의 륄리, 캉프라, 쿠프랭, 라모 등, 영국의 J. 블로, H. 퍼셀 등의 음악작품이 그 예입니다. 독일에서는 특히 프로테스탄트 작곡가의 활약이 눈에 띄며 종교음악·오르간음악의 장르에서 본고장의 이탈리아를 능가하는 발전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텔레만이라는 작곡가의 활동이 두드러졌죠. 이와 같이 바로크기는 근대음악의 탄생시대이고 성장시대였는데, 이 시기의 최후에 나타나 여러 경향의 음악을 종합해, 기념비적인 음악작품을 창조한 사람이 모두 1685년생인 과 의 두 사람입니다. 또 기악음악의 발전에 때맞추어 중세 이래의 여러 악기가 개량되어 새로운 종류가 생겨 나기 시작했는데요. 그 중에서도 특히 바이올린·오르간·쳄발로 등이 연주되었고 18세기 초에는 드디어 피아노도 발명되었습니다!
단선음악(Monody)
당대의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인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9세기에서 16세기까지 지배해 오던 음악적 통념은 대부분의 경우 다성음악 이었어요. 즉 몇개의 성부가 얽혀서 이루는 복잡한 음악이었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음악은 여러 성부가 아닌 단성으로 이루어진 독창 양식을 창출한 것이지요. 이것을 단선음악(Monody)이라 부르는데, 이 양식은 르네상스인들이 그리이스 고전에 대한 존경심의 부산물로 생겨난 것이라고 해요. 이상적인 그리이스의 모방은 반주를 없애고 독창 성부만 남기는 것이지만 이 단선음악은 독창과 반주의 선율이 뚜렷이 구분되어 있으며, 반주는 극히 축소되어 몇 개의 간단한 수직화음으로 압축되었지요. 그리하여 이 단선 음악이 급기야는 오페라를 탄생 시키게 되는 기초가 된 것입니다. 모든 바로크 작곡가들에게 공통된 특징은 음악을 사용하여 이념과 감정을 표현 또는 재현시키려 노력하였다는 것이지요. 또한 음악은 '분명한 이념'을 표현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것은 17세기 철학을 지배하였던 데카르트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는 교회의 역활이 전 시대보다 비교적 덜 중요하게 된 반면, 귀족 또는 종교적 후원자들이 음악활동을 지원하여 여러개의 아카데미가 형성되는데요. 특히 이 시기에는 비록 널리 알려 지지는 않았지만, 지금과 같이 입장료를 받고 연주회를 공개하는 상업적인 음악회가 1672년 영국에서 시작되어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시도되는데, 본격적인 것은 18세기 중엽 이후부터라고 하네요.
고전주의 시대는 보통 J.S. 바흐가 죽은 해인 1750년부터 1800년대의 중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경계가 그렇게 쉽게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낭만 음악의 거장인 슈만과 쇼팽이 1810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 해를 시점으로 보자는 견해와 베토벤이 죽은 1827년까지를 고전주의 시대로 보자는 견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하여튼 고전주의 시대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이른바 '빈 악파'의 세 악성들이 활약한 화려한 시대임은 틀림없다고 할 수 있지요. 18세기는 이른바 '계몽주의'가 풍미한 시대로서 상식이 통하는 사회,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를 추구하였습니다. 이렇게 개인이 자신의 내면 생활에서 마음껏 즐기는 것이 계몽주의의 특징인 현상이었습니다. 고전주의 음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18세기 사상은 다음과 같이 네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18세기는 범 세기적인 시대였습니다. 즉 한나라에서만 좋은 음악으로 인정되는데 그치지 않고, 많은 민족에게서 이해되는 음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이다. 그래서 낭만 시대와 더불어 이 시대가 '공통관습시대'라고 불리 우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시대는 인본주의를 추구한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이상들은 '프리메이슨 운동'으로 구체화 되어 전 유럽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으며, 모차르트도 여기의 열렬한 회원이었습니다. 셋째로는 중산층이 영향력 있는 위치로 발돋움하면서 예술과 학문의 대중화 과정을 보였습니다. 소수의 집단보다는 일반 대중을 의식하여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음악에서도 후원 조직은 쇠퇴하고 있었고, 근대적인 음악청중이 발생되고 있었습니다. 대중을 위한 악보 인쇄가 엄청나게 증가하였으며, 음악 저널리즘이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음악, 뉴스, 비평, 잡지들이 탄생되었으며, 첫 음악사들이 서술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계몽주의 시대는 산문의 시대입니다. 시적이기보다는 논리적인 이 시대는 바로크의 신빙성, 묵직함, 거창함 등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음악의 임무는 다른 예술처럼 자연을 모방하고 소리로 현실의 모양을 듣는 사람에게 기분 좋게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루소는 실제로 이 분야의 뛰어난 작곡가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음악은 몇 안 되는 좀 배웠다는 사람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현묘한 대위법적 복잡성을 피해야 했으며, 듣기 좋은 소리,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예술이어야 했던 것이어요. 모차르트의 음악이 쉽게 그리고 편하게 들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상적인 이유로서 작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취향에 따라 음악은 간결한, 그리고 선명하면서도 솔직한 선율을 택하게 되었으며, 이것을 화성적인 반주로 뒷받침하는 단성음악(Homophony)으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규칙적인 형식미를 추구하게 되었는데 그 형식도 간결하고 솔직한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모든 형식이 어떤 일정한 주제를 설정하고 통일을 유지하는 범주에서 변화 발전시켜 가는 논리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형식이 바로 소나타 형식인 것입니다. 이러한 고전주의(Classicism)양식의 기초는 바흐의 아들들과 요한 슈타미츠(1717 ~ 1757)를 대표로 하는 독일 만하임 악파의 작곡가들이며, 더욱 발전시킨 사람은 글룩,,등 이른바 빈 악파라고 하는 대가들입니다. 그러나 베토벤의 말년의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형식적이고 고전적인 균형감이 깨어져 주관적이고 낭만적인 경향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커다란 업적은 화성 음악의 확립, 소나타 형식의 확립과 발전, 기악 음악의 확립과 발전 즉 교향곡, 근대적 협주곡, 현악 4중주, 피아노 3중주 등의 기악 형식과 연주 형식의 확립 등입니다.
고전주의 본고장 "빈"
빈은 이른바 빈 고전파 음악을 생성 발전시킨 음악 역사에서 빛나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전까지의 음악사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들의 사정을 살펴볼까요? 이탈리아에서는 전통적으로 오페라가 특별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적 관현악곡은 비교적 중요성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바로크 시대에 소나타, 바이올린 협주곡, 콘체르토 그롯소(Concerto grosso)등의 합주실내악은 성행했지만 관현문향곡은 발생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사정은 19세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발레 오페라 등의 무대예술을 좋아한 프랑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편 프러시아에서는 7년 전쟁 때문에 빈곤한 사정에 놓여 있었고 또한 음악을 매우 사랑한 포츠담궁전의 프러시아 대왕 자신부터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음악에 마음을 기울였고 독일음악이란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만하임악파도 그 놀란만한 음악적 업적을 오래 지속하지는 못했으며 그 특유의 관현악 기법은 여러곳에서 모방되고 일반적인 관현악기법으로 보급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뒤따르는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유럽음악사회에서의 지휘를 급속히 잃게 된 것이죠.
오스트리아의 빈은 이미 그 역사를 멀리로마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또한 그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여러 지역에서의 교통과 교역이 마주치는 지점이 되었으며 또한 18세기에 들어와서 오스트리아는 강대한 대제국으로써 중부유럽에 군림하게 되었다는 이유도 있고 해서 오스트리아의 빈은 그야말로 게르만, 라틴, 슬라브등의 민족이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혼합공존하는 양상을 띄고 있었습니다. 중요성에 있어서는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아시아적 요소마저도 간직하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오스트리아는 16∼17세기에 터키군대의 집요한 침략의 위협에 놓여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현재도 빈교회에는 터키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요지이름을 딴 공원이 남아있어요. 위에서 살펴본 모든일들은 바로 빈이 그 시대의 대표적인 국제도시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예 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여 새로운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거대한 용광로처럼 지역적인 여러요소가 빈이라는 도시에서 합류되어 그야말로 인간적인 음악, 세계적인 음악이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이곳에는 게르만 이념, 이탈리아의 관능, 프랑스의 우아가 공존한다. 빈고전파를 형성하는 하이든, 모짜르트, 베토벤은 모두가 사실인즉 빈 출신은 아니였지만 빈은 그들을 포옹하고 또한 그들은 빈을 자기의 것으로 하여 고전적 이상에 어울리는 불멸의 작품을 낳게 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는 원래 음악적인 재능을 타고나 있었고 그러한 분위기는 몇세기에 걸쳐서 음악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빈의 귀족은 음악가들을 아낌없이 보호했을 뿐 아니라 사설의 관현악단, 오페라 하우스를 갖추기까지 했으며 이들 사이에는 이른바 선의의 음악적 경쟁이 생기기까지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음악은 일반 시민에게 있어서까지 꼭 필요한 생활을 즐거움이였으며 보람이기도 했구요. 빈고전파의 음악예술을 살펴보기에 앞서 이러한 것이 생성발전된 지반인 빈의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는 역사적인 과거라는 의미를 떠나서 오늘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지 않나요?
문학 및 예술에 있어서 낭만주의 운동은 19세기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음악사에서의 낭만주의 운동은 과거의 위대한 업적이었을 뿐만아니라 현재의 우리들의 음악생활에도 깊은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죠. 그러므로 이에 대한 이해는 그 만큼 중요성이 크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중세 세계의 공통어였던 라틴어의 입장에서 보아 지방어에 해당하는(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통용된) "로맨스"어로 쓰여진 공상적 기사이야기를 내용으로 하는 서사시를 로맨스(romance), 또는 로맨(roman)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형용사가 로맨틱(romantic)이 된구요. 그리고 이것이 우리말로 옮겨져서 "낭만적"이라는 단어가 생기게 됩니다.
낭만주의(Romanticism)예술은 현실의 시간과 기회를 초월하여 영원한 것을 잡으려 하고 세계의 폭을 넓히고 우주를 통해서 밖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19세기의 낭만주의 음악은 고전주의 음악 이상의 질서, 균형, 조절등에 대립하여 자유, 열정, 그리고 얻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를 즐겨합니다. 그리고 고전적인 분명성은 의도적인 애매성과 대치되고 암시에 의한 언급,은유,혹은 상징에 의해 대치되는 것입니다. 또한 시나 회화 등 음악 외적인 분야로 부터의 새로운 자극을 희구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음악의 기법에 있어서도 새로운 개혁을 갖게 되어 고전 음악 시대의 최고의 이상형식이었던 소나타을 대담하게 변형 또는 포기하고, 그 대신 자유롭고 유동적인 형식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율은 고전 음악 시대처럼 마디 수가 배수로 구성되는 규칙적인 것이 아니라, 불규칙적인 것이 많아지고 당김음이라든가 잇단 음표 등을 자주 사용해서 다채로운 변화와 표현의 폭을 넓히고, 그 음역도 확대하고 때로는 비성악 음정도 서슴치 않고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복잡한 리듬, 불협화음, 새로운 음색 등을 추구하며 대대적인 관현악 편성으로 압도적인 음향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낭만주의 음악의 특징 중 하나는 소곡의 애용에 있습니다. 유별나게 이 시대는 피아노를 위한 소곡이 많은 애호를 받게 되어 수 많은 명곡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야상곡(녹턴), 전주곡(프렐류드) ,연습곡(에튜드),판타지(즉흥곡), 폴로네즈, 마주르카 등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요. 낭만 음악의 징조는 베토벤의 후기 작품에서 나타났다고 하나, 옳은 의미로 낭만 음악의 첫 대가는 베버와 슈베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후 19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맨델스존, 슈만, 쇼팽 등이 나타나 낭만주의 음악은 더욱 새로운 방향으로 나타났는데 이들은 고전적인 수법이나 내용을 완전히 버리고 감정의 표현이라든가, 자연이나 인생 등 음악 이외의 자극을 좋아하고 소품에 대한 기호, 그리고 감정의 정열에 취향을 표시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음악을 중기 낭만주의 음악이라고 합니다. 한편에서는 파가니니의 자극으로 새로운 관능적인 음악이 나오고, 베를리오즈등에 의한 새로운 감각의 피아노 음악과 관현악이 나왔는가 하면 리스트에 의하여 고전적인 교향곡을 버리고 교향시가 새로이 등장하였습니다. 또한 바그너에 의하여 전통적인 오페라를 버리고 합리적인 악극이 창조되었는데 철저한 반음계법을 추구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는 서서히 조성이 붕괴되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1900년을 전후하여 브루크너, 말러, 볼프, 리하르트 수트라우스등이 바그너를 신봉하여 나갔습니다. 이러한 이상주의적 감정에서 후기낭만주의 음악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브람스를 비롯한 일련의 신고전주의 작곡가들이 등장하는 한편, 러시아의 국민음악 5인조(보로딘,큐이, 무소르그스키, 발라키레프, 림스키 코르사코프)를 비롯하여 노르웨이의 그리그, 핀란드 의 시벨리우스, 보헤미아의 스메타나, 드보르자크등이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나섰습니다.
후기 낭만주의 특징의 하나는 오페라의 전통을 발전시킨 비제, 이탈리아의 롯시니, 도니젯티, 벨리니로 이어지는 벨칸토 오페라의 완성을 비롯하여 베르디, 마스카니,레온카발로와 더불어 극적이고 박력있는 오페라를 작곡하여 근대 오페라의 금자탑을 쌓아올린 푸치니 등이 낭만주의적인 관현악의 색채와 극적인 표현을 추구하였습니다.
20세기 음악(현대음악)
20세기는 음악 역사상 세번째의 신음악(New Music)이 탄생되었습니다. 즉 14세기의 아르스 노바, 17세기의 바로크, 그리고 20세기에 바로 세 번째의 신음악이 생겨났는데, 보통 근대음악, 또는 현대음악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음악은 1,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대략 세 시기로 나눠집니다. 그 첫 시기가 20세기 초부터 제 1차 세계대전 까지로 낭만주의가 해체된다는 1890년부터 1917년 사이가 그것이다. 이 시기에 나타난 경향은 보다 개성화된 후기 낭만주의 성격의 것으로서, 순간적인 이상을 정묘한 음색(음화)에 고정시키려는 드뷔시의 인상주의(Impressianism), 원시적 생명력의 동경으로 나타난 스트라빈스키, 바르코크, 프로코피에프 등의 원시주의(Primitivism) 그리고 예술감각과 종교체험의 일치를 꾀한 스크라빈의 신비주의(Mysticism), 제1차세계대전 전 부터 대전 중까지에 걸쳐 유행했던 소음(타)악기로만 구성된 미래주의(Futurism)음악이 나타났습니다.
두번째의 시기는 1,2차 세계대전의 사이로서,1918년부터 1945년 까지를 가리킵니다. 첫번째로 나타난 것은 낭만파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부조니, 힌데미트 등의 신고전주의(Neo-classicism)입니다. 또한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반음계주의(Cromaticism)의 증대로 점차 조성이 파괴되어 무조음악(Atonal Music)이 나타났으며, 쇤베르크는 무조성을 지켜가면서 대규모의 악곡 구성을 가능케하는 기법을 추구, 마침내(다만 상호관계에 형성되는) 12음에 의한 작곡기법을 창시하였고 베베른과 베르크는 이를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그후 바르토크는 수치관념을 철저히 하여 보다 다면적이고 독자적인 음악기법을 확립하였으며, 메시앙도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기의 독자적인 체계를 확립하였습니다. 소련에서는 당의 정치적 요청에 의하여 서구적인 모더니즘을 일체 불식해 버린다는 방침으로 신고전주의적 경향이 가장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나 19세기의 작곡기법으로서의 회귀를 보입니다.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 카발레프스키 등이 그들입니다.
세번째의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를 말한다. 쇤베르크가 이룩한 12음기법은 2차대전의 종료와 더불어 젊은 세대의 습작으로서 또는 후진국 작곡가들에 위해 채택되어집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는 쇤베르크가 취한 음높이 뿐 아니라 리듬, 강약 음색등도 순열적인 사용에 의해 정밀한 음악 감각을 표현하는 음열주의가 대두됩니다. 그외에 쇄이퍼(Pierre Schaeffer)에 의해 고안된 구체음악(Concerete Music), 이것은 악기나 성대에서 제조되는 소리만을 음악의 재료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녹음기에 녹음이 된 다양한 소리를 음악의 재료로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또한 전자기기의 발달로 전자음악(Electronic Music)이 2차대전이후부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즉 전자가기적 힘으로 소리를 제작, 변형, 녹음, 재생시켜 음악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음악이 탄생된 배경은 새로운 음악적 사고와 그 사고에 맞는 음악적 재료를 자유롭게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1950년부터 서독 쾰른의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실험적으로 시작하여 1953년 창시자 아이메르트(H. Eimert)에 의하여 '음향습작1,2'라는 곡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2차 대전 이후의 특징 중의 하나는 불확정성 음악으로 연주 결과를 연주전에 예측할 수 없는 음악적 재료가 음악 속에 투입되어 있는 것으로써, 우연의 음악(Chance Music) 이라고도 불리우는 이것은 존 케이지를 선도로 하고 있다.
이렇게 20세기에는 음악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하는 여러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이러한 음악적 조류에 관하여는 아직도 찬반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즉 이 논쟁은 20세기 현대 음악과 인간과의 관계인데, 반대적 입장은 현대음악이 인간의 지각적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앞으로 세계가 여러모습으로 변화할 것임에 틀림없듯이 음악도 변화할 것임은 틀림없으며, 그것이 어떻든 간에 음악은 인간에게 삶의 여유를 가져다 주어야 할 것입니다.
2009.08.16./ NAVER 지식 in 에서 퍼 왔는데 저자가 이름을 밝히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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