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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좌측통행의 역사

   "경성 시가는 점점 번창함에 따라 자동차·자전거·인력거도 현저하게 증가하야, 심히 복잡함을 면치 못해 사고의 발생도 적지 아니해…."
   1920년 6월 15일 경기도 경찰부가 경성의 획기적인 교통대책을 발표한 배경이다. 당시(1920년 5월 말) 경성 시내에는 자전거 3455대, 자가용 인력거 205대, 영업용 인력거 1298대, 자동차 57대, 여객 마차 5대 등 모두 5020대의 '차량'이 북적대고 있었다.(조선일보 1920년 6월 28일자)
   교통량 증가에 대한 첫 번째 대책은 차량 종류별 통행금지 시간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1920년 6월 16일자 조선일보는 경성 시내의 행인과 우마, 차량 등의 통행량 조사를 토대로 경찰이 마련한 시간대별 통행 제한 조치의 내용을 전했다. 통행량이 가장 많은 본정(本町·충무로 일대)과 영락정(永樂町·중구 저동)의 경우, 오전 7~10시까지 우편배달이나 소방, 군용 외의 다른 짐차의 도로 중심 통행이 금지됐다. 또 오전 7시~오후 4시는 빈 '구루마(수레)'나 일 없는 자동차의 통행도 전면 금지됐다.
   아울러 경찰은 경성시내 유력인사 300명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한 결과, "답신을 보내온 113명 가운데 오른편으로 통행함이 좋다는 사람은 17명, 나머지는 모두 왼편으로 통행하기를 희망했다"며 좌측통행의 시범실시를 대책의 하나로 제시했다. 1905년 12월 30일 대한제국 경무청령 2호의 '가로관리규칙'에 따라 처음으로 보행자와 차마(車馬)의 우측통행이 규정된 이래 15년 만에 일본식 좌측통행이 도입된 것이다.
   좌측통행 시범 기간 중 '우측통행을 하다 마주 오던 자전거와 충돌, 행인에게 부상을 입힌 자전거 운행자에게 치료비와 상대방 자전거 수선비 2원을 지불토록하고 엄중 문책했다'는 기사(1920년 8월 13일자) 등에서 보듯, 좌측통행의 정착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제는 이듬해인 1921년 12월 1일, 좌측통행을 전면 도입했다. 이날자 조선일보는 "경기도 경찰부는 소방대와 비번 순사를 총출동해 선전 삐라를 행인에게 나눠주고, 경성전기회사는 전차를 좌측 운전으로 고쳤고, 상점들은 좌측통행 간판과 쪽지를 내붙였다"며 총독부의 대대적인 선전 활동을 소개했다.
   조선일보가 좌측통행에 전적으로 찬동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일보 '어린이 신문(1938년 4월 10일 특간판)'을 보면, "좌측통행하는 나라가 어딘지 아십니까? 군대의 행진 내놓고는 세계에 우리뿐입니다"라는 기사를 게재, 좌측통행이 군국주의 사회에만 있는 제도임을 어린이들에게 알렸기 때문이다.
   해방 후 1946년 미군정은 차량의 통행방식을 우측통행으로 바꿨으나 사람은 그대로 좌측통행하도록 내버려 뒀다. 그러다 2009년 10월 1일부터 보행자의 우측보행이 시범 실시된 데 이어, 지난해 7월부터 전면 실시됐다. 좌측통행 실시 근 90년 만이다. ▣ [조선일보201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