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에 최초의 월드 스타가 있다면,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Handel·1685~1759)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활동했고 영국으로 귀화했으니, 국경을 넘나든 당대 유럽 최고의 수퍼 스타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같은 해에 태어난 바흐(Bach)가 평생 독일을 떠난 적이 없었던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독일 할레에서 태어나 18세에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의 바이올린 단원으로 입단한 헨델은 이 극장에서 하프시코드 연주자와 오페라 작곡가로도 데뷔합니다. 첫 오페라 《알미라(Almira)》는 20일 가까이 상연될 정도로 호응이 좋았지만, 다음 작품인 《네로(Nero)》는 희극을 선호하던 청중 취향을 맞추지 못해 고전했던 모양입니다. 4세 연상의 작곡가 요한 마테존(Mattheson)과 우정을 쌓지만, 둘 사이의 다툼 끝에 칼부림이 벌어지기도 했답니다. 마테존의 칼날에서 헨델의 목숨을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외투의 단추였다고 하지요.
헨델이 이탈리아행을 마음먹은 건 21세 때의 일입니다. 메디치 가(家)의 초청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며 당시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동년배 작곡가 스카를라티(Scarlatti)와 연주 경연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하프시코드는 스카를라티의 판정승으로 끝났지만, 오르간에서는 헨델이 우위였다고 하지요. 하지만 훗날 헨델의 하프시코드 연주를 들은 스카를라티는 '헨델 혹은 악마의 솜씨'라고 경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5년간의 체류를 통해 헨델은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등 이탈리아에서 만개(滿開)했던 음악 장르를 맘껏 흡수합니다. 그의 주요 오페라로 꼽히는 《아그리피나(Agrippina)》를 초연한 곳도 당시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중심지였던 베니스입니다. 헨델 자신도 "음악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됐으며, 좋은 오르간 연주를 할 수 있었다"고 겸손하게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헨델은 1710년 하노버 궁정의 악장으로 초청받아 독일로 복귀했지만 얼마 후 영국에 주저앉고 맙니다. 일 년에 200파운드씩 받으며 영어 대본으로 영국 여왕의 생일을 기리는 축하 작품을 쓸 정도로 빠르게 정착했지만, 불과 4년 뒤 앤 여왕이 타계하면서 헨델에게 시련이 닥칩니다. 하노버 선제후(選帝侯)가 조지 1세로 왕위를 계승하면서 헨델은 '괘씸죄'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마음고생을 하던 헨델이 템스강에서 왕의 뱃놀이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것이 〈수상 음악〉입니다. 전형적인 관변(官邊) 음악이지만, 덕분에 우리는 바로크 관현악 걸작을 한 편 더 얻게 됐습니다.
마차의 시대에 전 유럽을 싸돌아다닌 덕분에, 헨델의 작품에는 독일의 엄격한 작법과 유려한 이탈리아 성악 양식, 경건한 영국 교회 음악의 요소가 모두 녹아 있습니다. 그동안 '음악의 아버지' 바흐에 가려서 제대로 된 별명 하나 얻지 못한 채 부당하게 평가절하된 작곡가가 바로 헨델입니다. 하지만 6~7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유럽을 풍미했던 이 위대한 작곡가를 《메시아》로만 기억하기엔 숨은 걸작이 너무나 많습니다. 베토벤조차 "헨델은 당대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였다. 나는 그의 묘지 앞에서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올해 서거 250주기를 맞은 이 세계인의 숨은 매력을 한껏 느껴보는 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 (조선일보 문화면 20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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