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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문.사.철.공학,컴퓨터)

'두문불출' 과 '함흥차사'

일반적으로 알려진 두문불출과 함흥차사 에 대한 유래는 오해나 오류가 많다. 

 

1. 두문불출의 경우: 두문동에서 두문불출이라는 표현이 나온 게 아님!

우선 두문불출의 경우, 두문동에 고려 유신들이 은거했기 때문에 두문동의 지명을 따서 '두문불출' 이라는 말이 생긴 게 아닙니다. 이건 정말 어처구니없는 오해구요, 오히려 그 반대로 '두문불출' 이라는 고사가 먼저 있었고 거기에서 두문동이라는 지명이 나중에 생긴 겁니다.

(두문동 -> 두문불출(X),   두문불출 -> 두문동(0))

 

이 고사성어는 고려 말기인 14세기 말에 생긴 게 아니라 훨씬 오래 전인 기원 전에 생긴 고사입니다. 중국의 오랜 역사서인 『국어』라는 책에서는 춘추전국시대의 진나라 관련 기록에서 대부 호돌이 두문불출했다고 적고 있고, 고조선 멸망 무렵인 한무제 무렵에 쓰인 『사기』에서도 춘추전국시대의 염파와 인상여의 열전에서 두문불출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사기』에 나오는 '두문불출' 구절을 잠깐 봅시다.

 

複請李牧。牧杜門不出,固稱疾。

(다시 이목(李牧)을 청하였으나 (이)목은 두문불출하며 병을 핑계대었다. )

 

밑줄 부분이 바로 '두문불출' 이라는 구절입니다. 두문불출이라는 건 '문을 막고 나가지 않다' 라는 말이므로 딱히 지명과 연계지을 구절이 아닌 겁니다.

 

이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한 구절은 조선왕조실록의 영조16년(1740년) 9월 1일의 부조현 관련 기록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 두문동이라는 지명이 어떻게 생겼는지 봅시다.

 

  임금이 연(輦: 가마의 일종)을 타고 가면서 시신(侍臣)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부조현(不朝峴: '임금에게 나와 조회하지 않는 현' 이라는 의미)이 어느 곳에 있으며, 그렇게 명명(命名)한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하니, 주서 이회원(李會元)이 아뢰기를,
  “태종(太宗)께서 과거를 설행했는데, 본도의 대족(大族) 50여 가(家)가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또 그 동리를 두문동(杜門洞)이라고 했습니다.(且杜門不出, 故又以杜門名其洞。)”
하였다. 임금이 부조현 앞에 이르러 교자(轎子)를 정지하도록 명하고, 근신에게 말하기를,
  “말세에는 군신의 의리가 땅을 쓴 듯이 없어졌는데 이제 부조현이라고 명명했다는 뜻을 듣고 나니, 비록 수백 년 뒤이지만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눈으로 보는 것처럼 마음이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
하고, 이어 승지에게 명하여 칠언시(七言詩) 한 구를 쓰게 하니, 이르기를, ‘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 [勝國忠臣勉繼世]’ 하였다. 수가(隨駕)하는 옥당과 승지·사관으로 하여금 시(詩)를 이어서 지어 올리게 하였으며, 또 직접 부조현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그 터에다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밑줄 부분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번역문만 보면 잘 감이 안 오실 수도 있는데 원문 표현을 그대로 살려 다시 적어 보자면 '두문불출했기 때문에 그 동네를 두문동이라고 불렀다' 라는 말이 되는 겁니다. 즉, 두문동이라는 지명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두문불출이라는 고사가 있었고, 그 고사대로 두문불출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그 동네를 두문동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두문불출이라는 고사가 고려 말 조선 초에 있었던 두문동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겁니다. 거꾸로 두문동이라는 지명이 두문불출이라는 고사에서 나온 것이죠. 그리고 두문불출이라는 고사는 기원 전부터 중국에서 자주 쓰인 표현일 뿐인 겁니다.

 

 

2. 함흥차사의 경우: 완전 '전설' 일 뿐 사실은 전혀 다름

앞분이 답변 단 것처럼 함흥차사는 이방원이 함흥에 있는 이성계에게 보낸 사신(차사)이라는 의미로서, 그 설화는 이성계가 차사를 족족 죽였다는 데에서 오랫동안 소식이 없는 사람을 일컬을 때 쓰이는 표현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조선 중후기의 야사집에서 나오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이성계는 함흥차사들을 그렇게 죽여댄 바 없습니다. 즉, 함흥차사의 이야기는 실제 역사와 다른 '가상의 전설' 의 산물일 뿐입니다.

 

예컨대 함흥차사 전설에 나오는 차사 중 거의 마지막 차사인 박순의 경우 태조의 마음을 돌렸으나 이후 태조 주변 신하들의 요청으로 박순의 뒤를 좇되 강을 건넜으면 놓아 두고 강을 건너지 않았으면 죽이라고 하였는데(여기에는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강은 건넜겠지 하는 심정으로~) 박순이 마침 병이 나서 강을 못 건넌 관계로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박순은 어찌 되었을까요? 박순의 죽음은 이성계와도 관련이 없고 또 강물을 건넜느냐 여부와도 관련이 없습니다. 이성계가 함흥에 있었을 무렵에 이성계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중앙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를 '조사의의 난' 이라고 합니다. 이 때 박순은 (이성계를 설득하러 간 게 아니라) 함흥 부근에서 도문순사 박만과 함흥 인근 지역의 수령들을 상대로 반란에 가담하지 말라고 설득하다가 반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겁니다.

 

아래는 조순의 죽음이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입니다.

 

상호군(上護軍) 박순(朴淳)을 동북면(東北面)에 보내었는데, 저쪽 군중(軍中)에서 피살되었다. 순(淳)이 함주(咸州)에 이르러 도순문사(都巡問使) 박만(朴蔓)과 주군(州郡) 수령(守令)에게 ‘사의(思義)를 따르지 말라’고 교유(敎諭)하다가, 마침내 저쪽 군중(軍中)에 피살되었다. 

-『조선왕조실록』태종 4년 11월 8일 1번째 기사

 

 

이 외에도 이방원이 보낸 함흥차사들을 이성계가 죽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인', 201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