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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실(또 다른 삶)

흙수저 든 손에 금젓가락을

대한민국은 먹는 거 빼면 할 얘기가 없는 모양이다. 한동안 '먹방'이니 '쿡방'이니 난리를 치더니 이제는 수저 타령이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가 대명사로 전환되어 지면을, 세간을, 저잣거리를 돌아다닌다. 사람마다 기준은 다른 모양이다. 술자리에서 친구 하나가 신세타령을 한다. 자기는 물려받은 것도 없고 집안에 잘나가는 사람도 없어 희망이 없단다. 건배사를 자청하더니 "흙수저"를 외치고 폭탄주를 한 번에 털어 넣는다. 외국 금융회사에 다니는 연봉 2억5000만원짜리 인생에 와이프도 그만큼 벌고 집 안에 테니스 코트도 있다고 들었다. 녀석이 화장실에 갔을 때 옆자리 친구에게 물었다. "쟤가 흙수저면 우리는 뭐야?" 시큰둥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냥 흙이야."

궁금한 것은 이 수저에 따른 인간 분류법의 목적이다. 분노인지 체념인지 자조인지 잘 모르겠다. 수업 시간에도 학생들이 이 단어를 종종 쓰는데 분노보다는 체념과 자조에 가깝게 들린다. 한마디로 맥이 빠진다는 얘기다. 분노도 썩 좋은 방식은 아니지만 체념과 자조는 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소생의 생각이다. 흙수저는 가계가 신통찮거나 돈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흙수저는 희망이 없는 것이다. 희망이 없다는 건 사람에게 최악의 진단이다. 사람이 희망이 아니라 희망이 사람이다. 취업 준비생들에게 50만원씩 나눠주는 건 희망을 나눠주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절망을 새록새록 일깨울 뿐이다. 최장 6개월이니 연 100만원이니 실행 방안을 놓고 여론 탐색전을 벌이는 모양인데 그 공짜 돈의 세례가 중단되었을 때 느낄 허전함과 배신감을 생각하면 별로 좋은 발상이 아니다. 지난번에 반(反)기업 정서를 '국민 질병'이라고 했다가 사방에서 돌을 맞았다. 대한민국 국민을 죄다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병자로 만들었으니 할 말은 없다. 실은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는데 글쓰기가 덜 여물어서 밀어넣지 못했다. 그래서 마저 한다. 반기업 정서란 게 말 그대로 '정서'다. 정서에는 설득이 치고 들어갈 틈이 없다. 아무리 설명해봐야 감정 영역을 논리로는 못 뒤집는다. 그래서 기업은 원론을 앞세워 대중의 정서와 논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그럼 어떻게?

정서에는 정서로 붙어야 한다. 이런 건 어떨까. 큰 기업들이 도(道)마다 시(市)마다 중·고등학교를 세우는 거다. 최고 실력을 갖춘 선생들과 역시 수준이 같은 외국인 선생이 절반쯤 되는 그런 학교다. 그래서 하위 30%(이건 그냥 예다) 가정 중에서만 선발하여 머리와 의지만 있으면 사다리를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거다. 원하는 인재를 키워 얻는 효과도 챙길 수 있으니 기업으로서는 인재 풀(pool)까지 동시에 챙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기업끼리 더 좋은 학교를 만들겠다며 경쟁이 붙으면 최고! 역차별이라고 하실 분도 있겠다. 어차피 복지란 게 선별적이다. 밥은 수저로만 먹는 게 아니다. 젓가락도 필요하다. 한 손에 흙수저를 들고 태어났지만 다른 한 손에는 금 젓가락을 쥘 기회를 주어야 한다. 반기업 정서가 누그러지면 제일 먼저 이득을 보는 게 기업이다. 그러니까 그 부분을 비용으로 치면 실은 남는 장사이자 고도의 마케팅 기법인 셈이다. 모쪼록 그 기법에 마구 휘둘려 봤으면 좋겠다. 더 늦기 전에, 어렵게 띄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허망하게 침몰하기 전에.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why, 조선일보.2015.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