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극장에서 가수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무대를 뚫어져라 보면서 공연 내내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랴 연기하랴 바쁘게 움직이는 가수들을 위해 가사의 첫 마디와 리듬을 양손과 입으로 알려 주는 프롬프터(prompter)다.
그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의 얼굴이 객석에 보이는 순간 무대에 대한 환상이 산산조각 나고 만다. 그가 잠시 꾸벅 졸았다고 ‘대형 사고’까지 터지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뭔가 느슨해질 것이 분명하다. 프롬프터는 관객에겐 ‘얼굴 없는’ 스태프에 불과하다. 하지만 오페라극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오페라 팸플릿에는 제작진 스태프 명단에 작은 글씨로 ‘프롬프터’ 또는 ‘음악 코치(musical preparation)’라고 나와 있다. 커튼콜 때 무대에 불려 올라가는 일은 없지만, 출연진과 제작진이 참가하는 공연 뒤풀이에선 가장 많은 박수를 받는다.
프롬프터 하면 대통령 취임식 연설 때 종이 원고를 보지 않고 투명 모니터로 원고 내용을 커닝하는 자막기가 떠오른다. TV뉴스 진행자들도 카메라에 장착된 프롬프터를 본다. ‘프롬프트(prompt)’는 ‘슬쩍 가르쳐 주다’, ‘생각나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다. 프롬프터를 가리켜 프랑스, 독일, 러시아에서는 ‘수플뢰(souffleur)’라고 부른다. ‘숨을 불어넣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마에스트로 수게리토레(maestro suggeritore)’라고 한다. ‘힌트를 주는 지휘자’라는 뜻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처럼 전문 프롬프터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탈리아 극장이나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선 부지휘자, 성악 코치 등 모든 음악 스태프가 번갈아 가면서 맡는다.
무대에선 오케스트라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혼자 허공에서 노래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럴 때 프롬프터가 박자와 리듬, 가사와 함께 정확한 시작 지점을 알려 주면 마치 벼랑 끝에서 튼튼한 밧줄을 잡은 기분이다. 프롬프터는 입술을 터뜨리는 가벼운 소리로 리듬을 알려 주기도 한다.
연출자에 따라 프롬프터 박스를 치우거나 무대 세트로 가리기도 한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피날레 장면에서 이졸데의 시체를 프롬프터 박스 위에 올려놓기도 한다.
1999년 소프라노 루스 앤 스웬슨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 출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몸이 아파 공연 개막 24시간 전에 출연 취소 결정을 내렸다. 트레이시 달이 대타로 투입됐다. 그는 공연 전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공연 당일 오후 7시 지휘자와 만나 피아노 반주로 한 번 리허설을 했다. 오후 8시에 공연이 시작됐고 플루트 반주로 부르는 ‘광란의 아리아’는 1막이 끝난 뒤 막간에 백스테이지에서 연습했다. 트레이시는 공연 내내 프롬프터 박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커튼콜에 등장한 트레이시는 몸을 앞으로 숙여 프롬프터와 악수를 나눴다. 관객들은 그때 프롬프터의 손을 난생 처음 보았다.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녹음한 ‘라 트라비아타’ 음반 가운데 1958년 3월 리스본 상 카를루 국립극장 실황이 가장 유명하다.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리스본 라 트라비아타’로 알려져 있다. 1997년 EMI 레이블에서 CD로 재발매했다. 테너 알프레도 크라우스가 알프레도로 출연한 이 음반에서 옥에 티는 프롬프터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다는 점이다. 칼라스가 평소 프롬프터에게 큰 ‘볼륨’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칼라스가 프롬프터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자 노래 중간에 무대 앞쪽으로 나오더니 아래쪽으로 보며 소리를 질렀다.
“더 크게!”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엔리코 카루소는 프롬프터가 없으면 무대에 서지 않았다. 1969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파바로티가 ‘라보엠’의 로돌포 역으로 출연하고 있었다. 3막 중간에 갑자기 극장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샹들리에가 춤을 추듯 흔들렸고 겁에 질린 일부 관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벌써 출구를 찾아 줄달음을 치는 사람도 있었다.
“무슨 일이죠?”
파바로티는 노래를 부르다 말고 프롬프터에게 물었다. “테레모토(Terremoto)! 지진이 났어요!” 프롬프터는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 말했다. 파바로티는 미미 역의 소프라노 도로시 커스텐의 손을 꽉 쥐고는 한 박자도 놓치지 않고 꽉 찬 발성으로 노래를 계속했다. 지진이 곧 잦아들었다. 객석 분위기도 평온을 되찾기 시작했다. 또 한 차례의 지진이 났다. 이번에는 파바로티의 노래에 전율한 청중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낸 것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근무하는 프롬프터 9명 가운데 풀 타임은 4명이다. 연봉은 7만 5,000~10만 달러(약 9,000만~1억 2,000만 원)다. 평일에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리허설을 참관한다. 가사와 선율을 외우는 것은 물론 지휘자의 템포나 가수 개개인의 호흡을 기억해 두기 위해서다. 본격적인 근무 시간은 오후 8시부터 자정까지다. 시즌당 5~6편의 작품을 맡아 매주 3~4회 공연에 투입된다. 개막 10분 전 블랙 커피 한 잔을 들고 프롬프터 박스로 출근한다. 졸음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을 축이기 위해서다.
무대 주변에는 출연자의 구둣발, 커튼, 무대 장치, 소품에서 먼지가 엄청나게 발생한다. 근무하지 않은 날에는 객석에서 발 쭉 뻗고 마음 편하게 오페라를 즐길 것 같지만 청각을 예민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공연 관람은 하지 않고 그냥 집에서 쉰다고 한다. 객석에서 공연을 볼 때는 마치 어린 아기를 물가에 내놓은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오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프롬프터를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예산과 시설, 인력의 부족 때문이다. 국내 무대에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8중창을 완벽한 앙상블로 듣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실 국내 가수가 프롬프터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많은 작품에 출연할 기회도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사를 어떻게 다 외우나 (오페라 보다가 앙코르 외쳐도 되나요, 2012. 5. 31.,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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