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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실(또 다른 삶)

[스크랩] 국립발레단장 강수진

국립발레단장 취임 한 달을 맞은 강수진(47)을 지난 3일 만나기로 했었다. 전날 저녁 전화를 걸었더니 강수진은 잔뜩 쉰 목소리로“제가 감기에 걸려서 열이 좀 나는데 그래도 내일 인터뷰는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연신 기침을 했다.
‘그래도 할 수 있다’는‘포기는 없다’ 와 함께 47년 강수진 인생의 구호이자 주문(呪文)이다

.“ 예정대로 하겠다”는 강수진을 오히려 기자가 뜯어말려서 하루 쉬게 하고 4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내 국립발레단 연습실에서 만났다.
“내 인생에 변명은 없다. 아프면 아플 수 밖에 없는 거다. 겪어야 하는 건 겪으면 되고.‘ 뭣 때문에’라고 이유를 대는 것은 시간 낭비다.‘ 왜 아플까, 안 아프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에 쓸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스트레칭이라도 한번 더하겠다.”
독일에서 활동하던 강수진이 귀국한 것은 지난달 3일. 그는 수트케이스 하나만 들고 인천공항에 들어섰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신

‘나비부인’의 주인공 초초상으로 14회 무대에 선 그는 1월 30일 공연을 마치고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집으로 돌아가 짐을 싼 후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발레단엔 4일부터 출근했다.
강수진의 인생엔 쉼표가 없다.“ 삶이 빡빡한 건 당연한 거다. 늘 그렇게 살아 왔다. 지금은 적응하느라 더 정신없지만 이럴 줄 알면서도 발레단을 맡겠다고 했다. 그저 하루가 24시간밖에 안 된다는 게 원망스러울 뿐이다.”


◇귀국 후 2주간 편의점 샌드위치로 끼니 때워
—발레리나에서 국립발레단 단장이 된 지 한 달이다. 예상과 다르거나 어려운 점은 없었나.
“매일 새로운 일을 배운다는 자체가 재미있다. 새로움은 곧 스트레스이다. 하지만 스트레스 없는 인생이 어디 있나. 어려운 점을 굳이 찾자면 결재 문서에 표기된 원화 액수를 가늠하려니 머리가 아팠던 것 정도? 유로화에 익숙해 있다가 공(0)이 많은 원화를 보니 낯설더라. 하지만 그것도 한 달 지나니 대충 파악했다.”
—행정 경험이 전혀 없다는 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공연 단체를 운영하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건 한국이나 독일이나 마찬가지다.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서 28년을 보내면서 무대뿐 아니라 사무실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발레단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예전부터 봐왔다. 현장에서 부딪히며 배웠던 것도 넓게 보면 행정이었다. 나
는 그걸 다 겪고 살아남았지 않은가.”
그는 예술의전당과 가까운 서초구 방배동에 집을 얻었다. 업무 파악하고 작품 연습하는 데만도 시간이 부족해 집 꾸미는 건 엄두도 못 냈다. 침대와 옷장 등 기본 가구만 들여놨다. 강수진이 끊임없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다이어트를 어떻게 하느냐”이다. 대답은 한결같다.“ 가리지 않고 먹는다”이다. 대신 먹고 운동해서 몸에 여분의 지방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국립발레단장을 맡은 이후엔 그 좋아하는 양념갈비 한 번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다. 가리지 않고 먹는 식성은 그대로인데 식사를 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귀국 후 2주간은 집 근처 편의점에서 매일 똑같은 샌드위치와 주먹밥을 사서 김치와 같이 먹었다”고 했다.
—단장을 맡으면서 생활이 발레리나였던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나.
“아주 기본적인 생활 원칙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지킨다.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나 커피 한 잔 마시고 40분 정도 운동한다. 이번에 감기 걸린 건 이곳에 적응하는 과정일 것이다. 잠을 제대로 못 자니까 몸이 알아서 파업을 했다고 할까. 어제 하루 약 먹고 잔 게 처음으로 누린 단잠이었다.”


◇군무로만 10년, 솔로 데뷔도 늦었던 스타
   강수진은 자신을“눈물, 콧물 흘릴 거 다 흘려본, 모든 걸 다 해 본 여자”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알아주는 발레리나인 그는 초등학교 때 한국무용을 배우다. 1980년 선화예중 1학년 때 발레를 시작해 1982년 모나코 왕립발레학교로 유학 갔다. 발레 시작 5년 만인 1985년 세계 최고 권위의 주니어 대회인 로잔국제발레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그랑프리를 받았다. 그 이듬해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 동양인 최초이자 최연소 단원으로 입단했다.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이라는 브누아 드 라당스상도 동양인 최초(1999년)로 받았다. 발레의 발상지인 유럽 땅에 진출해 서양인도 꿈꾸기 어려운 최고의 위치에까지 오른 것이다.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종신단원으로 최고의 대우를 받던 강수진은“한국 발레를 위해 봉사할 때가 된 것 같다”며 올해 초 국립발레단장을 맡았다.
그러나 대중이 기억하는‘최초’와‘최연소’의 기록 뒤에는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던 세월도 있었다.

강수진도 한때는 군무(코르 드 발레₩corps de ballet)대열에 서 있는‘5번 백조’였다. 그 세월이“10년이나 된다”고 말했다.

 철저한 계급사회인 발레단에서 군무로 10년을 버틴다는 것은 어지간한 의지력이나 열정이 아니고서는 생각하기 힘들다. 대개 몇년 못 버티고 그만두거나 다른 발레단으로 이직한다.
—최연소로 입단했으니 분명 촉망받는 무용수였을 텐데 군무에 오래 머물러야 했던 이유는?
“실력이 안 됐으니까 승급이 안 됐을 거다. 아마 그 발레단에서 코르 드 발레를 제일 오래 했을 것이다. 당시 예술감독이 신인에게는 기회를 안 줬다. 새로 키우기보다 기존 주역을 밀어줬다. 그때 주역 무용수들 실력이 뛰어나긴 했다. 보면서 많이 배웠다. 제가 지금 행복한 건 고생을 해봤기 때문이다. 고생은 가치를 알게 해주지않나. 어딜 가나 불평이 많은 사람은 고생을 모르고 자란 사람들이더라.”
—모든 무용수가 주역 발탁을 꿈꾸는데, 긴 세월 어떻게 버텼나?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승급이나 솔로 데뷔를 꿈꿔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발레를 한 이유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같다. 목표나 꿈을 정해두고 달렸으면 중간에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 상이나 칭찬이 아니라 좋으니까 하겠다는 생각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견딜 수 있었다.”
—그 당시에 우울증도 겪었다고 들었다.
“외롭고 공허해서 음식을 가까이했다. 피자도 시켜먹고. 그러다 몸무게가 10㎏나 늘었다. 공연장 옥상에 올라가 뛰어내릴까 여러번 생각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군무를 오래했다는 것에 감사드리는 심정이다. 솔로이스트 이상이 되면 그룹 연습이 드물다. 다 같이 연습을 오래 하다보니 무용수가 겪는 온갖 상황에 대해서 환히 알게 됐다. 저는 솔로이스트로 승급돼서도 독무를 추는 무용수가 되기까지 몇 년이나 걸렸다.
그래서 제가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다.‘ 난다겪어봤다, 발레단 구석구석 이해할 수 있다’고.”
—그래도 스타가 된 후에는 늘 화제의 중심에만 있지 않았나.
“제 인생의 전환점은 발레단 경력이 꽃폈을 때가 아니라 남편을 만난 이후였다.
그전까지는 늘 사막에 홀로 떨어진 것 같았고 우주의 미아처럼 떠도는 느낌이었다.”


◇사랑을 유지하는 비결?

 저 자신을 사랑하는 거죠. 강수진보다 일곱 살 연상인 남편 툰치소크맨은 같은 발레단의 발레리노였다.
그는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선배이면서 자상한 남편이자 전천후 요리사이며 든든한 친구이자 엄격한 매니저다. 1986년 발레단 입단 직후에는 얼굴만 알던 두 사람은 1989년부터 사귀기 시작했다. 혹독한 연습으로 굳은살이 배긴 강수진의 유명한 발 사진을 찍은 것이 소크맨이다.

1996년 은퇴한 소크맨은 독일에서 공연 기획사를 운영하며 강수진의 매니저로 일하다 이번에 함께 귀국했다.
—남편이 어떤 역할을 할지가 귀국 전부터 무용계의 관심사였다.
“저희 발레단의 객원 자문위원(guest coach adviser)이다. 무보수로 일한다. 봉사하는 심정으로 발레단을 위해 헌신하려고 저와 함께 왔다. 발레단장 제의를 받은 제가‘지금이 맡을 적기인 것 같다’고 하자 흔쾌히‘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좋다’고 했다. 언어도 안 통하는 이
곳에서 힘들 텐데도 국립발레단을 발전시키기 위해 온 것이다.”
인터뷰 중 잠시 자리를 함께한 소크맨은 “무용수와 직원들에게 경험을 나눠주는 것이 나의 일”이라며“내년에는 환상적인 발레단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른쪽 팔뚝에 수진이라는 두 글자를 문신으로 새긴 그는“우리는 하나(We are one)이기 때문에 내 몸과 마음에 항상 수진을 갖고 산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영어로 대화한다.
강수진은 예술가가 많은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초등학교 2학년생 강수진을 리틀엔젤스예술단 시험장으로 이끌었던 어머니 구근모씨는 화가 구본웅(1906 ~1953)의 셋째딸이다. 세 살 때 마루에서 떨어져 척추 장애인이 된 구본웅은 시인 이상(1910~1937)과 소학교 때부터 절친한 친구였다. 유사한 장애를 지녔으나 불타는 예술혼을 보여준 프랑스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1864~1901)를 연상시킨다고‘조선의 로트레크’로 불렸다. 이상은 구본웅에게 시‘具8氏의 출발’을 바쳤고, 구본웅은 유화〈사진〉에 이상을 영원히 남겼다.
아버지 강재수씨는 사업을 하다 은행원이던 구씨와 결혼해 3녀1남을 뒀다. 강수진의 언니 여진씨와 여동생 혜진씨는 모두 하프 전공으로 서울대 음대를 졸업했다. 언니는 재미교포와 결혼해 미국에 거주하며, 동생 혜진씨는 독일에서 하피스트로 활동한다. 남동생 대준씨는 금융권에서 일한다. 몽골 출신인 시어머니는 터키 앙카라오페라단의 프리마돈나였다. 시동생은 비올라를, 동서는 첼로를 전공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도 비교적 유창하게 하는 강수진은 최근 몇년 사이 한국어 표현이 부쩍 늘었다. 기자와 4년 전 만났을 때만 해도 가벼운 단답형 답변 위주였으나 이제는 물 흐르듯 거침이 없다.
기자가 소크맨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강수진은 연습복에서 평상복으로 갈아 입었다. 청바지에 빨강, 노랑, 파랑, 은색 스팽글(반짝이)이 전면에 가득 박힌 티셔츠였다.“ 원래취향이냐”고물었더니“남편이 사준 것”이라며 활짝 웃었다.
—부부애가 남다른 걸로 유명하다.
“지금도 우리는 24시간 붙어 있어도 내내 재미있게 얘기하고 잘 논다. 오래 같이 살다 보면 얘기할 거리가 없다는 부부도 있지만 우리는 갈수록 할 얘기가 더 많아 진다.”
—‘24시간 내내 붙어 있어도 좋은’사랑의 비결이 있다면.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다. 너만을 위해 산다는 건 사랑이 아니다. 부담감만 준다. 자신에 대해 자신감이 있어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저희 부부는 각자 끊임없이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성장하고 있다. 저는 저대로 배우고 남편은 남편대로 배우고 있다.”


◇이제는 춤도 사랑도 몰아붙이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다’가 평생 신조이지만 때로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도 오늘의 강수진을 만들었다.
—모든 일을 포기하지 않고 살다 보면 무리도 하게 될 텐데.
“열이 40도가 넘었을 때 공연한 적이 있다. 제가 생각해도 미쳤던 것 같다. 10년쯤전이다.‘ 잠자는숲속의미녀’에서 오로라 공주 역할이었는데, 열이 오르건 말건 무조건 해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는 원래 체력 소모가 많은 작품으로 악명이 높은데.
“공연을 완전히 망쳤다. 완전히. 끝까지 한 게 제 스스로 대견하긴 했는데, 공연이 엉망이 됐으니 무슨 소용이 있었겠나. 평소 후회를 남기지 않는 편인데, 그때는 너무나 후회했다. 그래서 열이 올랐을 때는 공연을 안 하는 걸로 원칙을 바꿨다.”


◇국립발레단이 반짝반짝 빛날 때까지
—현재 국립발레단의 수준을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이번에 부산에서‘라 바야데르’공연을 했는데 저는 만족했다. 세계적 수준에서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작은 실수가 몇 번 있었지만 그거야 최고의 발레단에서도 다 하는 것 아니겠나. 실수가 없으면 재미도 없고.”
—어떤 면이 부족하다고 보나?
“디테일만 질적으로 보강하면 될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전반적인 인식이 바뀌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나라 수준에 대해서 스스로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더라. 세계를 돌아다녀 본 제가 봤을 때 정말 자랑스러워해도 되는 수준이다. 단원들이 흡수력이 뛰어나 발전 가능성이 풍
부하다. 전날 지적한 건 다음 날 대부분 고친다. 그들의 잠재력을 일깨워 반짝반짝 빛나는 발레단을 만들고 싶다. 단원들을 자식처럼 아끼지만 자식과는 또 다르다. 제가 무조건 돌봐주는 것이 아니라 저와 동등한 프로페셔널 무용수로 존중하고 대한다.”


◇쉰 앞둔 현역, 올해도 내년에도 공연
우리 나이로 마흔여덟인 강수진은 엄연한‘현역’무용수다. 1월에 공연한 인스브루크발레단의‘나비부인’을 오는 7월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하고, 내년 내한하는 슈투트가르트발레단과 함께‘오네긴’에도 출연한다. 현재까지 밝힌 공식 은퇴 시점은 2016년이다.
—단장이 현역으로 뛰면 발레단에 부담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제겐 발레단 업무가 우선이다. 현역 무대는 제 개인의 책임이다. 제가 힘이 더 들겠지만 발레단에 영향이 가지 않게 할 자신이 있어서 맡겠다고 한 것이다.”
—많은 이에게 발레는 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이다. 그런데도 왜 발레를 봐야 할까?
“발레는 일상을 벗어나 파라다이스로 가는 가장 아름다운 통로다. 컴퓨터에 붙어사는 요즘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가까운 예술적 친구가 없다. 정 졸리면 눈 감고 음악만 들어도 보람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강수진에게 발레란 무엇인가?
“발레가 제 삶이다. 발레를 했기에 산다는 게 뭔지 알았고,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발레에 대한 정의가 남편을 소개할 때 쓰는 표현과 같은데.
“남편이 제 삶이기도 하니까. 그래도 발레보다 남편이 더 좋다.”
—예전에는 발레리나가 마흔만 돼도 환갑이라고 했는데, 여전히 무대를 지키고 있다. 지금의 나이가 돼서야 깨닫게 된 무대의 진실이 있다면.
“제가 일상에 최선을 다한다고는 하지만 저도 사람이니까 일 년에 며칠 빼고는 굉장히 힘들다. 하지만 그 며칠 때문에 나머지 날도 행복한 것이다. 어렸을 때는 모든 무대가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열번이면 열 번 다 최고로 만들려고 발버둥쳤다. 하지만 일 년에 딱 한 번 느낌이 좋은 무대에 서면 그 힘으로 일 년을 가는 균형을 깨치게 됐다. 무사히 끝난 것만도 만족할 때도 있고. 무조건 채워야 행복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게 연륜이 준 선물인 거 같다.”
“집에 가서 푹 쉬라”고 인사를 하고 나서는데,‘ 강철나비’강수진은 “어제 하루 푹 잤으니일을더해야한다”고말했다.“ 잠이야 무덤에 가면 실컷 잘 텐데요. 두 번 살거 아니잖아요? 인생 한 번인데요, 뭐.”

 

[조선일보, WHY, 201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