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에 나는 분명 살고 있었는데도 그때 일을 생각해 보았지만 시간대가 뒤죽박죽되고, 정경 또한 희미하여 정확히 떠오르지를 않는다.
어렴풋이나마 한 두 장면 떠 올랐다가도 순간적으로 스쳐버리고, 그나마 너무 단편적이어서 한 두어 줄 정도의 글로도 이어 가 지질 않는다.
우연히 박목월님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어찌나도 그 시절을 정확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렸는지 탄복하였다. 구수하고도 맛깔나는 문장이 더해지니 글이 살아 움직여 나왔다. 적합한 어휘를 자유로이 골라쓰시는 대문장가(大文章家)의 글을 접했다는 것은 복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 시절로 온전히 돌아가 잠시동안이었지만 현재를 잊어 버렸다.
다음은 그 수필중의 일부를 그대로 옮긴다.
"소농촌이라 하지만 오늘날의 그것과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농촌과는 사뭇 다르다.
그 때만 하여도 땔감이라고는 섶가지뿐이었다. 구공탄(九孔炭)이라는 어휘조차 없었다. 그러므로 초봄이 되면 산판을 사들이어 1년 내내 땔 수 있는 나무(생솔가지)를 쪄 들여야 했다. 우리 고장에서는 그것을 <갓을 친다>고 하였다. 갓을 치러 가는 날은 1,2십명의 놉(품군)을 해서 미리 벼른 낫이나 도끼를 소바리에 싣고 새벽에 길을 떠났다. 집에서는 술을 거르고, 새벽밥을 지어 그들을 보내는 것이다. 물론 3,40십리나 심산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어린 우리들이 딸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저녁 무렵이 되면 소바리마다 생솔가지를 긷고 웅성거리며 돌아오게 되었다. 바깥마당에 장작불을 피워 두고 술잔치가 벌어지곤 하였다. 이 행사가 어느 정도 끝날 무렵이면 집집마다 퍼런 생솔가지의 나뭇단이 볏가리처럼 쌓이고, 골목길에 들어서기만 하여도 향긋한 생솔가지의 송진 냄새가 풍겼다. 농촌에서 자란 어린 우리들에게는 생솔가지의 싱그러운 송진냄새가 봄을 실감하게 하였다. -야하, 이 냄새.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린 우리들은 코를 벌름거리며 생솔가지에서 풍겨오는 싱그러운 냄새에 취하곤 하였다. 그러므로 농촌의 봄이라면 나는 그 싱그러운 생솔가지의 송진 냄새를 연상하게 된다. 또한 그 싱그러운 냄새는 소박하고 정다운 생활(농촌생활)에 대한 향수를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갓을 치는 일은 대체로 양력 2월 말께서 3월 초순이면 끝나 버린다. 그 일이 끝나면 송기를 벗기는 일이 시작된다. 물이 오른 소나무 가지의 굳은 껍질을 벗기면 하얀 속껍질이 나오게되고 그것을 훑어 먹으면 달큰한 것이 먹을 만하였다. 군것질이라곤 전혀 있을 수 없는 농촌 어린이들에게 송기는 별미의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공일날에는 마을 아이들과 어울려 송기를 벗기러 가는 것이 즐거운 놀이요, 아침부터 도시락에 점심을 싸 들고 송기를 벗기러 가곤 하였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풀뿌리를 캐먹지 않을 수 없는 당시의 절량농가(絶糧農家)에서는 송기를 벗겨 먹는 것으로 끼니를 때우곤 하였다. 하지만 어린 우리에게 송기를 벗기는 일이 그처럼 절박한 행위가 될 수는 없고, 오로지 물이 오른 소나무 가지의 달콤한 맛에만 이끌렸기에 그 맛이야말로 지금도 혀에 남아 있는 어린 날의 아른한 추억의 미각일 수 있다.
미각이라면 콩고물을 빼놓을 수 없다. 송기를 벗겨다가 짓이겨서 떡을 해 먹었다. 그러나 소나무 껍질만으로 떡이 되지 않는다. 송기를 짓이겨 밀가루나 찹쌀가루와 범벅을 해야 한다. 때로는 햇쑥을 뜯어다가 함께 버무리기도 하였다. 송기쑥떡이나 송기떡을 쪄서 콩고물에 묻혀 먹었다. 쫄깃쫄깃하고 고소한 송기떡은 그야말로 별미중의 별미였다. 더구나 콩고물은 농촌에서 자란 내게는 잊혀지지 않는 것의 하나였다. 겨울철이 되면 어머니가 도시락을 싸 주실 때 반드시 콩고물을 덮어 주셨다. 밥이 차지 않고, 도시락이 썽그렇게 식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었다. 우리 또래의 아이들은 누구나 콩고물이 덮인 도시락을 싸오게 되고, 뚜껑을 열면 노란 콩고물이 묻어나곤 하였다.
콩고물의 노란 빛깔은 두 가지의 연상을 환기시켜 준다. 하나는 개나리요, 하나는 송화가루이다. 촌에서 개나리가 흔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마을에서는 개나리투성이였다. 안마을 한복판에 서당이 있고, 서당을 끼고 개울이 흘렀다. 그 개울둑을 따라 2킬로미터 정도 개나리꽃이 봄이 되면 노랗게 잦아져 피었다. 그러므로 멀리서 보게되면 이른 봄의 황량한 들판에는 눈이 부시게 찬란한 띠가 한 줄 둘러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콩고물이라면 역시 실감있게 연상되는 것이 송화가루이다. 송화가루는 계절적인 면에서는 봄보다 이른 여름에 속하는 것일 수 있다. 햇소나무 가지에 햇순이 돋아나 두어 뼘 정도 자라게 될 무렵에 비로소 시꺼먼 봉오리에 송화가루가 날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그 무렵이면 논마다 물을 잡게 되고, 못자리의 볍씨는 제법 자라게 된다.
송화가루는 털어 두었다가 꿀과 버무려 송화가루단지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린 날에 고모님과 송화가루를 털어본 기억이 있다. 우리 고장에서는 송화가루를 턴다고 하지 않고 송화가루를 받는다고 하였다. 하늘이 베풀어 준 이 아름다운 가루는 털기보다 받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수 있다.
개나리꽃이 필 무렵이면 이내 살구꽃이 핀다. 우리마을은 속칭 살구징이(행정리杏亭里)라 불렸었다. 그만큼 살구나무가 많았다. 집집마다 해묵은 살구나무가 마당이나 뒤안에 한두 그루씩 있었다. 그러므로 봄철이 되면 온 마을이 살구꽃으로 덮이게 되고, 뒷등성이에서 바라보면 살구꽃의 안개 속에 묻힌 것 같았다. 어린 우리들에게는 그와 같은 풍경은 너무나 황홀한 것이었다.
이것은 두목(杜牧)의 유명한 싯귀이지만, `목동이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킨다'는 이와같은 이미지는 동양적인 신비성을 띠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원(桃園)이나 도리(桃里)는 이상향의 대칭으로서 유토피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구꽃이 만발한 농촌의 정경은 현실적인 그것보다는 <꿈의 마을>같은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행복이나 영원한 아름다음이 깃들어 있는 듯한 행복감으로 감싸버리게 된다.
더구나 밭머리에 들복숭아꽃이 환하게 만발한, 꿀벌들이 소란스럽게 드나드는 밭을 갈고 있는 농부를 대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흐뭇한 장면을 보는 듯한 감동에 젖게 되는 것이다. 어린 우리들은 그와같은 장면을 화면(畵面)에 담으려고 애를 썼으며, 흰빛과 분홍빛 크레용으로 문지르게 된다. 아무리 어린 우리들이 그리는 그림이 졸렬하고 어설픈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으로 무방하였다. 이미 그림의 평가는 선생님이 채점을 하시기 전에 우리 스스로 충분한 댓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환상적으로 다가온 장면을 그리는 동안 가슴속에서 샘솟는 <가슴 울렁거리는 감동>과 충만감은 우리만이 경험하는 흐뭇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시인 박목월 선생님의 마지막 수상록인 <내 영혼의 숲에 내리는 별빛>에 수록된 수필로, 문학세계사의 허락하에 여행스케치2011년4월호에 게재된 것을 그대로 옮겼다. 1979년 발행당시의 원고 그대로를 살려 오늘날의 표기법이나 문장부호 등과 다소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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