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조선일보 선임기자 최보식이 음악인생 50년을 맞은 정명훈과의 인터뷰기사를 스크랩한 글이다.
나는 다시 물었다.
"단원들과의 불화, 갈등이 생기면 어떻게 해결했나요?"
"해결 못 하는 거죠. 그럴 때가 여러 번 있었어요. 단원들이 말 안 듣고 너무 어렵고 하기 싫으면…, 해결방법은 도망가는 거죠."
"도망? 하하하."
나는 홍소(哄笑)를 터뜨렸고, '마에스트로' 정명훈(57)도 말에 더욱 신이 난 것 같았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몸짓을 해보이기도 했다. 간혹 무표정한 얼굴에 신발부터 바지·스웨터·재킷까지 검은색으로 차려입었지만, 그 내면에는 뭔가 다른 것이 꿈틀대고 있었다.
―지휘를 맡았는데 그냥 도망을 갈 수 있나요?
"리허설(연습) 하다가 도저히 안 되면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나,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요. 세 번이나 중간에 가버린 적이 있습니다. '뮌헨 라디오 오케스트라'에서 지휘할 때 '비올라' 수석단원이 꼬치꼬치 대꾸했어요. '어려운 소절을 따로 연습하자'고 하면, '우리를 왜 연습시키느냐, 공연 때 완벽하게 할 건데' 하는 식이었죠. 그래서 '연습이 필요없으면 내가 여기 있을 필요가 없겠군. 난 가겠다' 하고는 비행기를 타고 로마 집으로 와버렸어요. 다음날 전화가 왔어요. 이 사람들은 내가 '가겠다'고 했을 때 '연습을 그만 하는 걸'로 알았던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가장 심각했죠. 베를린 필은 지휘자로 한번 서는 것만 해도 영광이고 경력에서도 중요하죠. 단원들은 모두 수퍼스타죠. 그러니 젊은 내가 '어떻게 하라'고 하면, '왜 그러느냐'며 인정을 하지 않아요. 연주회 날 아침 마지막 총리허설을 할 때 '모두가 프리마돈나뿐이냐.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지휘를 못하겠다'고 폭발했죠. 부(副)악장이 '누가 그런가' 묻기에, 그를 가리켜 '바로 당신, 그리고 저쪽에 당신, 당신, 당신, 굿바이' 하고 나와버렸어요."
―그렇게 하고 나면 그쪽 세계에서 소문이 나 '블랙리스트'에 오를 텐데요.
"베를린 필에서는 다시는 나를 부르지 않겠다고 분개했지요. 그 사건 이후 12년이나 지나서야 베를린 필에서 다시 지휘할 수 있었죠. 지금으로부터 7년 전, 내가 쉰살이 됐을 때였어요. 단원들이 많이 바뀌었고 젊어 보였어요. 지휘봉을 다시 잡으니 절로 감회가 생겨 '나는 더 나이가 들고 당신들은 더 젊어지니 참 좋다'고 했어요."
―한때 인기있던 TV드라마 주인공 '강마에'처럼 답답한 단원들에게 고함지르고 욕도 합니까?
"가만히 서있어요. 말을 안 할 때 단원들이 더 무서워해요. 저는 성격이 부드럽지 않아요. 어색하고 불편하면 금방 느끼죠. 20년 전(1989년) 젊은 나이에 프랑스 국립 바스티유 오페라단의 음악감독을 맡았을 때, 나보다 몇 배나 경험이 많은 단원들을 지휘한다는 것은 맞지 않아요. 억지로 하는 거지, 안 하면 어디서 (지휘를) 배울 수도 없고 발전이 안 되니까. 연습이 끝나면 즉시 빠져나왔어요. 20년 동안 파리에 살면서 만나는 친구는 8명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정말 많이 좋아진 거죠."
―그래도 교향악단에서 계속 지휘자로 불러주기는 했군요.
"그런 사건은 평생 세 번이고, 연주한 횟수는 수천 번이었으니까요. 좋은 연주가 많았으면 다시 초대받죠. 클래식 음악에서 성공하려면 독일·영국·미국에서 많이 해야 해요. 하지만 저는 로마와 파리에서 30년을 살았어요. 내 취향이 이탈리아와 맞았기 때문이죠. 이탈리아 사람들은 급한 성질도 비슷하고 우리처럼 노래 부르길 좋아하죠. 물론 음식도 잘 맞고."
―선생의 노래 실력은 크게 뛰어나다고 듣진 않았는데요.
"노래는 못 해요. 지휘자로서 제일 답답한 것은 스스로 소리를 못 내는 거죠. 음악가라면 말 그대로 소리를 내야 하는데, 그걸 못하니 그만큼 바보 같은 게 없죠. 지휘자가 굉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뭐 '피자 딜리버리(배달)'와 같아요."
―피자 배달이라?
"어떻게 소리낼지는 악보에 다 씌어 있고, 소리내는 것은 오케스트라가 있죠. 지휘자란 피자를 만들어 얼마나 빨리 뜨겁게 배달해주느냐의 역할이죠. 다 식으면 누가 먹겠어요."
처음 '예술의 전당' 연습실에서 만났을 때, 서로 낯선 상대에 대해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올해가 '음악인생' 50년이 됐다. 이 때문에 인터뷰를 하는데도 그는 부인했다.
"그건 7살 때 처음 서울시향과 피아노를 협연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태어나기 전부터 음악을 시작했다고 말하죠. 뱃속에 있던 9개월 전부터."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건 과장이 좀 심하군요."
하지만 그는 진지하게 힘주어 덧붙였다.
"저는 태어나기 전부터 음악을 들었다고 생각해요. 우리 집과 가족은 늘 음악 속에 있었으니까요."
―그런 음악적 삶에서 한 번도 빠져나온 적이 없습니까?
"전혀…아, 꼭 한번 있었어요. 제가 여덟살 때(1961년) 우리 가족은 미국 시애틀로 건너가 한식당을 했어요. 내 또래들은 죽어라고 훈련할 시기인데 난 6년을 탱탱 놀았지요. 피아노를 치는 게 아니라 주방에서 요리 보조를 더 많이 했고, 농구·야구 등에 빠졌어요. 당시 음악 선생님도 '조건이 있다. 좋은 음악가라면 몰라도 피아니스트만 되고 싶으면 내게 오지 마라'고 했어요. 그 때문에 난 지휘자가 된 것 같아요,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그게 무슨 뜻인가요?
"음악을 좀 넓게 보고, 다른 악기도 만져보고…, 오로지 피아노만 아는 인생을 살지 말라는 것이었죠."
―백건우씨 같은 피아니스트는 세상을 굉장히 좁게 사는 것이겠군요.
"악기를 한다는 것은, 피겨선수 김연아가 새벽에 일어나 하루종일 스케이트만 타는 것처럼 모든 시간을 거기에 다 쏟아부어야 해요. 아무리 좋은 재능이라도 좋은 코치를 만나 꾸준히 테크닉을 배우고 기계처럼 돌아가야 해요. 악기를 하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어요. 하지만 지휘자는 어릴 때부터 연습만 지독히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위험하죠. 어떤 경우 지휘에 좋지 않을 정도로."
―그러면 지휘자에게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알 수 없죠. 그 방법을 알면 책을 썼고, 베스트셀러가 됐게요."
―하지만 선생은 일찍이 지휘자로서의 어떤 가능성을 보여 그 길로 갔겠지요? 그게 뭐였나요?
"경화 누나(바이올린)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아마 지휘자가 됐을 거예요. 클라리넷을 하는 형은 저보다 음악적 재능을 더 타고났어요. 하지만 이것저것 전체적으로 보면 제가 지휘자에 들어맞았죠. 제게 뭔가 있었겠지요. 하지만 요즘 날리는 후배 지휘자처럼 '본(born) 리더'는 아니었어요. 나는 비사교적이었죠. 무척 수줍어했고, 말도 안 했죠.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라는 거장(巨匠) 밑에서 LA필하모니의 부지휘자로 일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 훌륭한 분 밑에 있으면 끊임없이 질문하고 배워야지요. 하지만 저는 3년 동안 딱 3번 물었어요. 어떤 대목의 악보가 너무 복잡해 악기 소리가 어떻게 나올지 자신이 없어, 처음으로 악보를 보여주고 물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나도 그 곡을 지휘해본 지 오래돼 공부하고 알려주겠다'고 해요. 며칠 뒤에야 나를 불러서 악보를 몇 초 동안 가만히 보고 다시 덮고는 '미스터 정, 잇 테이크스 타임(이걸 알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해요. 그게 끝이었죠. 그건 '스스로 너 길을 찾아야 한다'로 들렸죠."
―자신에게는 뭔가 있었다고 하는데, 무엇이 있었습니까?
"리더십이란 누구를 어떻게 설득하는 것인데, 지휘자란 단원들을 따라오게 해야죠. 그것 없이는 천재라도 지휘자가 될 수가 없죠. 내게는 그런 재능이 좀 있어요."
―내성적이고 수줍어하고 한때는 말도 없었다는데 어떻게 그런 재능이 있는 거죠?
"이는 우리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이죠. 우리 형제 셋을 뉴욕 사립음악학교에 보내는데, 어머니는 교장을 만나 '지금은 이 학교에 한국 학생이 한 명도 없다. 우리 아들을 받아주면 10년 안에 이 학교에 한국 학생들이 몰려올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때 두 배로 물려주겠다. 나를 믿어라'고 설득하는 식이었어요. 정말 우리 형제는 모두 입학했어요. 나도 나 자신이 믿고, 원하고,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정말 상대를 설득시킬 수 있어요. 어머니의 교육 방법은 특별했어요. 내가 그렇게 탱탱 놀고 식당일을 하는데도 항상 잘한다는 말만 했어요. 잘한다. 잘 한다고 하니, 정말 잘해야 한다는 긴장감이 늘 있었지요."
―어머니의 교육법은 워낙 유명하고, 그런데 왜 아버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나요?
"교육은 어머니가 다 맡았으니까요. 일평생 부엌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아버지는 미국에서 음식점을 할 때 주방을 맡고 어머니가 서빙을 담당했지요. 아버지는 말씀이 별로 없고 스포츠를 좋아하고 요리를 잘했죠. 사실 제가 아버지 외모나 성격을 그대로 닮았어요."
―선생께서도 요리책을 내고 직접 음식도 만든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요리할 시간적 여유가 있나요?
"연습이 끝나면 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바로 집으로 갑니다. 그저께는 밤 10시20분에 도착해 1시간 반 동안 음식을 만들어 자정쯤에 먹었어요. 빨리 해낼 수 있는 것, 있는 재료로 만드는 것, 그게 제 특기입니다. 파스타와 김치찌개를 즐기죠. 저는 음악과 요리를 빼고는 다른 일은 하기가 싫어요. 와이프가 요리하는 것은 일년에 내 생일과 크리스마스 때 딱 두 번이죠."
―지휘자의 스트레스를 집안에서 풀지는 않나요?
"결혼 전에는 음악밖에 몰랐죠. 그게 전부였죠. 하지만 이제는 삶의 최고 가치를 가정에 두고 있어요. 가족 때문에 내 음악을 그만둬야 한다면 미련없이 버립니다. 순서가 확실히 정해졌어요."
―오호, 어쩌다가요?
"저는 비관적 성격이었어요. 남들로부터 '잘한다'는 말을 듣는 사람은 항상 스스로 못하는 것만 생각하죠. 그런데 1979년 결혼을 하면서 내가 바뀌었어요. 나는 구름처럼 음울했는데 와이프는 햇볕이 쨍쨍 비치는 사람이죠. 결혼으로 나의 50%를 잃고 와이프의 50%를 얻었던 거죠. 난 와이프를 애칭으로 '미러클(기적)'이라고 부르죠. 내 삶을 바꿔놓은 기적을 행했으니까요."
그제야 내가 벅찬 인터뷰 상대를 만났음을 확연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조선일보 2010.2.1 문화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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