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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론,에피소드

서울모테트합창단 지휘자 박치용의 이야기

   대부분의 음악가가 유학을 떠날 나이인 20대 중반, 지휘자 박치용(46)씨는 민간 전문 합창단인 서울 모테트(Motet) 합창단을 창단했다. 1989년이었다. "독주자는 강하지만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실내악단 같은 앙상블은 허약한 현실에서 '음악 인프라'를 제대로 구축하고 싶었다"는 꿈이었다. 많은 민간 합창단이 5년도 채우지 못하고 해체되는 척박한 현실 속에서, 올해 창단 20년을 맞은 서울 모테트 합창단은 700차례가 넘는 연주 활동을 통해 한국 음악계의 대표적 민간합창단으로 자리 잡았다.
   박씨는 음대 졸업 후 방위병으로 근무하면서 선교단체 합창단을 주말과 저녁 틈틈이 지도했다. 초등학생 시절, 미국의 명(名)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진행하는 '청소년 음악회'를 본 뒤부터 지휘의 꿈을 꾸었기에 1주일에 두세 차례 지휘로는 성이 차질 않았다.
   독일어를 공부하면서 유학을 준비하던 계획도 미뤄놓고 1989년 서울 모테트 합창단을 만들었다. 음악교사와 직업 합창단원·대학원생 등 노래의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모였고, 현재 단원 40명 가운데 10여명이 15년 가까이 박씨와 동고동락했다. 박씨는 '학사 출신으로 한국의 대표적 합창 지휘자'가 됐다. 박씨는 "유학을 가지 않으면 최소한의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한국 현실에서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인생을 걸어야 했다"며 "나 자신도 이렇게 오랫동안 버틸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며 웃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는 국공립 합창단이 아니다 보니 어려움도 많았다. 창단 첫해 7000만원이던 한 해 예산은 이제 그 10배인 7억여원까지 늘었지만, 지금도 국공립 합창단에 비하면 20~30% 수준이다. 박씨는 "합창단은 다른 직업에 비해 보수가 낮고, 그중에서도 우리 합창단은 더더욱 낮은 편"이라고 했다. 음악감독으로서 지휘, 단장으로서 안살림, 대표로서 바깥살림까지 책임지는 '1인 3역'을 하고 있는 그는 "지방 연주를 떠나도 호텔 대신 여관에서 자고, 싸게 먹고 아끼면서 버텼다. 연주마다 생존이 걸려 있는 '헝그리 정신'이 오히려 합창단을 끌고 온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서울 모테트 합창단은 대중음악과 섞는 크로스오버(crossover)를 삼가고, 종교음악에 매진하며 정체성이 뚜렷한 음악단체로 인정받는다. '모테트'는 주로 종교적 내용의 노랫말을 여러 성부로 부르는 합창 음악을 뜻한다. 박씨는 "크로스오버가 좋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아니더라도 할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라며 "누군가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을 해야만 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창단 20년을 맞은 올해 서울 모테트 합창단은 바흐와 헨델, 하이든과 멘델스존의 대표작을 연이어 올리는 굵직한 무대들을 마련했다. 31일 바흐의 《마태수난곡》에 이어, 5월 31일 하이든의 《천지창조》, 7월 2일 바흐의 《B단조 미사》, 10월 13일 멘델스존의 합창 명곡, 12월 15일 헨델의 《메시아》 등 1년에 한 번 연주하기도 쉽지 않은 곡들로 채운다. 그는 "모테트는 서양 종교음악에서 가장 처음 뿌리내리고 모습을 갖춘 장르"라며 "음악에서든, 삶에서든 그 순수함을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  [조선일보 2009.3.24.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