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15) 김종필(1926~)
낭만적 기질의 그에게 권력 넘어갔다면, 정치판 달라졌을 수도
발행일 : 2018.03.03 / Why B2 면
새벽녘 김종필에 관한 글을 한 편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더니 1940년대 내가 즐겨 부른 뒤 그동안 한 번도 부르지 않은 이 노래가 갑작스레 생각났다. '반월성 너머 사자수 보니/ 흐르는 붉은 돛대 낙화암을 감도네/ 옛 꿈은 바람결에 살랑거리고/ 고란사 저문 날에 물새만 운다/ 물어보자 물어봐 삼천 궁녀 간 곳 어디냐/ 물어보자 낙화 삼천 간 곳이 어디냐.'
김종필은 1926년 충남 부여의 비교적 부유한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주에 가서 중학교를 마치고 대전사범학교를 거쳐 어느 초등학교에 부임했지만 얼마 뒤에 그만뒀다. 들어가기 어려운 경성사범학교 연수과에 입학했는데, 그 학교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개편되는 바람에 3년쯤 공부하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버느라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
내가 김종필에 대해 아는 것은 대부분 그의 절친한 친구이면서 나의 친구이기도 한 평양사범학교 출신 육사 8기생 석정선에게 들은 것이다. 석정선은 60년대 후반 가족과 함께 보스턴으로 가 살았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김종필은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말을 잘하는 것은 타고난 재능이겠지만 그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기도 했고 서예도 상당한 수준으로 익혔다. 그래서 조금은 거친 목소리로 엮어나가는 그의 이야기에서는 유식한 면이 엿보였다. 훤칠한 몸매에 잘생긴 얼굴, 학생 때부터 말도 타고 그림도 그려 어지간한 수준이었고 골동 취미도 대단해 만일 그가 고미술에 전념했다면 전형필의 간송미술관 못지않은 미술관을 하나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어느 한 가지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 낭만적 기질의 소유자였다.
석정선의 말에 따르면 8기생들이 김종필의 정치 기반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고 한 가지 일을 꾸며 놓으면 김종필은 그 기회를 자기를 위해 쓰지 않고 자기가 모시던 박정희에게 가져다 바치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종필은 대권에 도전하지도 않았고 대권을 휘어잡을 수도 없었다. 다만 그에게 특이한 버릇이 하나 있었는데, 가까운 친구를 아무도 없는 데서 만나면 손을 내밀어 악수하는 대신 남자 지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꼭 잡는 버릇이 있었다는 것이다.
무료한 날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가 친구들과 함께 육사 8기생으로 군에 입대한 사실은 김종필 한 사람만의 운명이 아니라 조국의 운명을 바꾸는 큰 계기가 된 것이 사실이다. 소위로 임관하고 정보 계통 장교로 요직을 맡았던 그는 진급도 가장 빨랐다. 다른 육사 8기생들은 자신들의 진급이 왜 이리 더디냐며 불만을 가졌다. 자기 일은 아니었지만, 김종필은 4·19를 치르고 총리가 된 장면을 8기생을 대표해 찾아가 그 부당함을 호소했는데 그것이 '하극상'으로 되잡혀 상당수 8기생과 불명예스럽게 군복을 벗었다.
불명예제대를 강요당한 8기생 중에는 사범학교 출신의 머리 좋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전셋집 하나도 얻을 수 없는 빈털터리로 살길이 막연해 거리를 헤맬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다. 김종필이 친구를 따라 당대 유명한 관상가 백운학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백운학이 친구 관상은 볼 생각도 하지 않고 김종필을 보더니 대뜸 '당신 혁명을 할 관상을 가졌어. 혁명하면 성공할 거야'라는 말을 던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화는 확인하지 못했다. 매우 합리적이던 그가 점쟁이 말을 듣고 혁명을 일으켰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어지럽기 짝이 없는 민주당 정권하의 세태를 바라보면서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던 터에 군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던 박정희와 사이에서 혁명의 불길이 치솟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종필은 5·16 군사혁명의 주역이고 그 혁명을 성공시킨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알기에 그는 한 번도 정치나 정권에 집착하지 않았다. 군사혁명을 자랑하지 않았고 5·16 군사혁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때 그는 "이 나라 역사에 다시는 혁명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한 적이 있다.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해 당의장이 됐고 국무총리 자리에도 올랐으며 아홉 번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됨으로써 명실공히 정치권력의 2인자가 됐지만, 흔히 있는 정치인들과는 생리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정치인이면서도 정치인이 아니었다.
혁명으로 시작해 18년이나 집권할 수 있었던 박정희는 왜 혁명 주역이던 김종필에게 권력을 넘길 절차를 밟지 않고 있다가 10·26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까. 낭만적 정치인 김종필 손에 권력이 넘어갔다면 좀 더 합리적인 민주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만일 그가 대권을 잡게 됐더라면 한국 정치가 오늘의 이런 꼴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쉬움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김종필은 1926년 충남 부여의 비교적 부유한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주에 가서 중학교를 마치고 대전사범학교를 거쳐 어느 초등학교에 부임했지만 얼마 뒤에 그만뒀다. 들어가기 어려운 경성사범학교 연수과에 입학했는데, 그 학교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개편되는 바람에 3년쯤 공부하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버느라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
내가 김종필에 대해 아는 것은 대부분 그의 절친한 친구이면서 나의 친구이기도 한 평양사범학교 출신 육사 8기생 석정선에게 들은 것이다. 석정선은 60년대 후반 가족과 함께 보스턴으로 가 살았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김종필은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말을 잘하는 것은 타고난 재능이겠지만 그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기도 했고 서예도 상당한 수준으로 익혔다. 그래서 조금은 거친 목소리로 엮어나가는 그의 이야기에서는 유식한 면이 엿보였다. 훤칠한 몸매에 잘생긴 얼굴, 학생 때부터 말도 타고 그림도 그려 어지간한 수준이었고 골동 취미도 대단해 만일 그가 고미술에 전념했다면 전형필의 간송미술관 못지않은 미술관을 하나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어느 한 가지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 낭만적 기질의 소유자였다.
석정선의 말에 따르면 8기생들이 김종필의 정치 기반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고 한 가지 일을 꾸며 놓으면 김종필은 그 기회를 자기를 위해 쓰지 않고 자기가 모시던 박정희에게 가져다 바치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종필은 대권에 도전하지도 않았고 대권을 휘어잡을 수도 없었다. 다만 그에게 특이한 버릇이 하나 있었는데, 가까운 친구를 아무도 없는 데서 만나면 손을 내밀어 악수하는 대신 남자 지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꼭 잡는 버릇이 있었다는 것이다.
무료한 날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가 친구들과 함께 육사 8기생으로 군에 입대한 사실은 김종필 한 사람만의 운명이 아니라 조국의 운명을 바꾸는 큰 계기가 된 것이 사실이다. 소위로 임관하고 정보 계통 장교로 요직을 맡았던 그는 진급도 가장 빨랐다. 다른 육사 8기생들은 자신들의 진급이 왜 이리 더디냐며 불만을 가졌다. 자기 일은 아니었지만, 김종필은 4·19를 치르고 총리가 된 장면을 8기생을 대표해 찾아가 그 부당함을 호소했는데 그것이 '하극상'으로 되잡혀 상당수 8기생과 불명예스럽게 군복을 벗었다.
불명예제대를 강요당한 8기생 중에는 사범학교 출신의 머리 좋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전셋집 하나도 얻을 수 없는 빈털터리로 살길이 막연해 거리를 헤맬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다. 김종필이 친구를 따라 당대 유명한 관상가 백운학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백운학이 친구 관상은 볼 생각도 하지 않고 김종필을 보더니 대뜸 '당신 혁명을 할 관상을 가졌어. 혁명하면 성공할 거야'라는 말을 던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화는 확인하지 못했다. 매우 합리적이던 그가 점쟁이 말을 듣고 혁명을 일으켰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어지럽기 짝이 없는 민주당 정권하의 세태를 바라보면서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던 터에 군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던 박정희와 사이에서 혁명의 불길이 치솟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종필은 5·16 군사혁명의 주역이고 그 혁명을 성공시킨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알기에 그는 한 번도 정치나 정권에 집착하지 않았다. 군사혁명을 자랑하지 않았고 5·16 군사혁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때 그는 "이 나라 역사에 다시는 혁명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한 적이 있다.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해 당의장이 됐고 국무총리 자리에도 올랐으며 아홉 번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됨으로써 명실공히 정치권력의 2인자가 됐지만, 흔히 있는 정치인들과는 생리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정치인이면서도 정치인이 아니었다.
혁명으로 시작해 18년이나 집권할 수 있었던 박정희는 왜 혁명 주역이던 김종필에게 권력을 넘길 절차를 밟지 않고 있다가 10·26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까. 낭만적 정치인 김종필 손에 권력이 넘어갔다면 좀 더 합리적인 민주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만일 그가 대권을 잡게 됐더라면 한국 정치가 오늘의 이런 꼴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쉬움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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