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와 카르타고가 서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한바탕 전쟁을 벌였을 때다.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코끼리 떼를 이끌고 피레네와 알프스를 넘고, 궁지에 몰린 로마가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하는 등 역사보다는 영화에 가까운 스펙터클이 펼쳐지는 가운데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로마는 참 치사한 짓을 했다. 카르타고와 조약을 맺으면서 다른 나라와 전쟁을 금지한다는 조항을 끼워 넣은 것이다.
누구한테 얻어터지더라도 무조건 참고 견디라니 이보다 더 황당한 조약이 없다. 그래 놓고 로마는 카르타고의 인접국인 누미디아를 꼬드겨 카르타고를 치게 했다. 아무리 초등학생이 날리는 펀치라도 온종일 맞다보면 어른도 기절하는 법이다. 견디다 못한 카르타고는 칼을 빼들 수밖에 없었고, 로마는 조약 위반을 핑계 삼아 카르타고를 아예 지도에서 지워버렸다. 로마가 특별히 사악해서가 아니다. 역사에서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에게 하는 짓이 이렇다.
미국과 중국의 외교 차관보가 동시에 서울을 다녀갔다.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잔뜩 찌푸린 표정의 중국 차관보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내내 도끼눈을 뜨고 있었고 미국 차관보도 썩 밝은 얼굴은 아니었다. 중국은 깔지 마라, 미국은 깔면 좋겠지만 우리 판단에 맡기겠다는 입장이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 방어 시스템) 배치를 놓고 양측이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 중국의 태도에서 로마를 떠올린 건 소생뿐이 아니겠다.
우리는 지금 핵을 머리에 이고 살고 있다. 우리가 아직 피부로 핵을 체험하지 않은 이유는 오직 하나 북한의 핵소년이 아직 제정신이기 때문이다. 이 소년이 스트레스 과다 혹은 분노 조절 장애로 버튼을 누르는 순간 서울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이어 세 번째로 역사책에 기록된다. 게다가 이 소년이 지배하는 나라는 여기다 실어 보낼까 저기다 실어 보낼까 다채롭게 미사일을 실험하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손놓고 보고만 있으라니 이 사람과 이 나라는 제 정신인가.
중국이 이런 발언을 타당하게 하려면 자기들이 북한에서 핵을 다 제거하거나 적어도 북핵에 대한 제어를 자신들이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말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물론 전혀 없었다. 이 사람들에게는 대한민국이 아직도 고려나 조선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조공국이거나 제후국이거나 식민지거나 혹은 기타 등등이거나.
한때 문명서진(西進)론이라는 게 유행했다. 오리엔트에서 출발한 문명이 그리스, 유럽을 거쳐 미국에 도달한 것처럼, 문명의 중심이 서쪽으로 또 서쪽으로 이동한 끝에 우리나라에 이른다는 일종의 S.F 민족주의다. 얼마나 주변 열강에 치이고 외교가 심란했으면 그런 만담으로 위안을 삼았을까마는 모쪼록 재미로만 즐길 일이다. 만에 하나, 혹시 그렇더라도 그다음 도착지는 중국 아니면 다시 중동으로의 회귀일 텐데 지금 하는 꼴로 봐서는 제발 중국으로는 안 갔으면 좋겠다.
외교는 포커페이스로 하는 게임이다. 밖으로는 웃어도 속내는 따로 있어야 한다. 중화 문명이냐 해양 문명이냐. 우리는 6·25전쟁을 통해 해양 문명에 편입됐고 그 자의 반 타의 반 선택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번 '이례'적인 일은 앞으로 '의례'적인 일이 될 것이다.
[조선일보, WHY, 남정욱 숭실대 교수, 201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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