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게실(또 다른 삶)
김동길 인물 에세이 23 ; 손기정
나그네46
2018. 6. 4. 00:45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23) 손기정(1912~2002)
맹물로 굶주린 배 채우고… 키 160㎝ 손기정은 달리고 또 달렸다
발행일 : 2018.04.28 / Why B2 면
20세기에 들어서 조선(한국)은 강제로 일본에 합방돼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1905년 보호조약이 그 서곡이었고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은 일본에 예속돼 살아야만 했다. 그 암울했던 세월에 조선과 조선인을 빛낸 사나이 세 사람을 고른다면 첫째가 안중근, 둘째가 윤봉길, 셋째가 손기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두 사람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렸고 한 사람은 두 다리로 달리고 또 달려서 쇠사슬에 묶여 신음하던 2000만 동포에게 큰 기쁨을 주었을 뿐 아니라 세계를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키가 160㎝밖에 안 되는 스물네 살 조선 청년 손기정이 바로 그 사나이다.
그는 가까이 압록강이 흐르고 긴 둑이 보이는 신흥 도시 신의주의 가난한 동네,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났다. 손기정이 태어나기 1년쯤 전 신의주와 안동(단동)에 철교가 가설됐고, 그는 철교 밑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손기정은 자서전에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적어 놓았다. 소년 시절에만 가난했던 것이 아니다. 서울에 가서 양정고보에 다닐 때도 배고픈 세월을 보냈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배고픈 자신을 달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 것이었다. 배고픈 사람은 걷기도 어렵다는데 그는 맹물을 마셔가면서 굶주린 배를 채우고 달렸다. 그는 고향집에서 보통학교(소학교)에 다닐 때도 5리 길을 달려서 가고 달려서 왔다. 전국적 대회에 몇 번 나가 2등은 하는 실력 때문에 양정고보 입학이 가능했지만 그 시절에도 어딜 가나 뛰어서 다녔지 걷는 일은 없었다는 청년이 손기정이었다.
1936년 베를린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을 때 독재자 히틀러는 독일의 총통이었다. 올림픽의 그 많은 종목 가운데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는 마라톤이다. 세계인의 시선이 집중돼 있고 히틀러도 그 경기장에 나와 있었다고 한다. 인종 문제에 관한 편견이 심하던 히틀러는 그 마라톤에서 가장 우수한 인종으로 그가 믿었던 아리안족, 특히 게르만족 선수가 1등으로 경기장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1등으로 들어온 선수는 동양인이었다. 키도 작고 몸집도 가냘픈, 조그만 일장기를 가슴에 붙인 일본 선수였다. 경기장에 들어서서 100m를 11초에 달렸다고 하니 기적의 사나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장내 아나운서는 1등으로 들어온 선수가 일본인이 아닌 줄 알았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조선의 대학생은 세계의 건각들을 가볍게 물리쳤습니다. 그 조선인은 마라톤 구간을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로 뛰었습니다. 이제 그가 엄청난 마지막 스퍼트로 질주하여 들어오고 있습니다." 일제는 '올림피아, 민족의 제전과 미의 제전'이라는 레니 리펜슈탈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는데 20분 가까이 나오는 손기정의 영상을 보고 조선인들은 감격하였다.
손기정은 2시간 30분 벽을 깨고 2시간 29분 19초라는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고 2등은 영국의 하퍼, 3등은 조선 청년 남승룡이었다. 손기정은 머리에 월계관을 썼지만 만세를 부르지도 않았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가슴에 단 일장기를 가렸다는 소문도 있다. 일장기를 달고 달린 사실 그리고 우승한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우승할 마음을 가지고 달렸겠지만, 그 마음 한구석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이 함께 있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에 들어갔다. 졸업과 동시에 은행에 취직하여 한동안 은행원 노릇을 하기도 했지만, 본업은 달리는 일이었다. 해방 후 체육에 관심이 많던 몽양 여운형의 눈에 들어 한때 그가 하는 일을 돕기도 하였지만, 몽양이 1947년에 저격당해 세상을 떠나게 되어 그 인연도 끊어졌고 혼란하기 짝이 없는 정국 속에서 체육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려고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체육계 또한 정계 못지않게 혼란하여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70대 후반의 나이에 한 번 우리 집에 와서 식사를 하였는데 그리 높지도 않은 우리 집 2층까지 계단을 힘겹게 올라왔다. 25세 때에는 잘 달리던 두 다리 힘을 과시하며 독재자 히틀러를 놀라게 했던 그 청년이 걷기조차 어려워하는 노인이 된 것을 보고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내가 군사정권에 시달리며 감옥에 들락날락하던 때 무슨 일로 손기정을 만나면 다정한 목소리로 "김 교수, 고생이 많지요"라고 한마디 위로의 말을 던지곤 하였다. 언제 만나도 그는 정의감이 강한 강직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그를 기념하는 조그마한 공원이 시내 만리동 양정학교 안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아직 가보지는 못했다.
손기정 이후 한국의 마라톤은 1947년과 1950년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하고 1992년 56년 만에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딴 황영조와 2001년 보스턴마라톤에서 이봉주 우승으로 그 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2012년 손기정 탄생 100주년에 태어난 새로운 후배가 또다시 베를린올림픽의 영광을 되살리는 준비를 하고 있을 것으로 나는 믿는다. 손기정은 1936년 그 감격을 함께한 모든 한국인에게 언제나 그립고 언제나 고마운 마라톤의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그는 가까이 압록강이 흐르고 긴 둑이 보이는 신흥 도시 신의주의 가난한 동네,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났다. 손기정이 태어나기 1년쯤 전 신의주와 안동(단동)에 철교가 가설됐고, 그는 철교 밑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손기정은 자서전에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적어 놓았다. 소년 시절에만 가난했던 것이 아니다. 서울에 가서 양정고보에 다닐 때도 배고픈 세월을 보냈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배고픈 자신을 달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 것이었다. 배고픈 사람은 걷기도 어렵다는데 그는 맹물을 마셔가면서 굶주린 배를 채우고 달렸다. 그는 고향집에서 보통학교(소학교)에 다닐 때도 5리 길을 달려서 가고 달려서 왔다. 전국적 대회에 몇 번 나가 2등은 하는 실력 때문에 양정고보 입학이 가능했지만 그 시절에도 어딜 가나 뛰어서 다녔지 걷는 일은 없었다는 청년이 손기정이었다.
1936년 베를린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을 때 독재자 히틀러는 독일의 총통이었다. 올림픽의 그 많은 종목 가운데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는 마라톤이다. 세계인의 시선이 집중돼 있고 히틀러도 그 경기장에 나와 있었다고 한다. 인종 문제에 관한 편견이 심하던 히틀러는 그 마라톤에서 가장 우수한 인종으로 그가 믿었던 아리안족, 특히 게르만족 선수가 1등으로 경기장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1등으로 들어온 선수는 동양인이었다. 키도 작고 몸집도 가냘픈, 조그만 일장기를 가슴에 붙인 일본 선수였다. 경기장에 들어서서 100m를 11초에 달렸다고 하니 기적의 사나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장내 아나운서는 1등으로 들어온 선수가 일본인이 아닌 줄 알았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조선의 대학생은 세계의 건각들을 가볍게 물리쳤습니다. 그 조선인은 마라톤 구간을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로 뛰었습니다. 이제 그가 엄청난 마지막 스퍼트로 질주하여 들어오고 있습니다." 일제는 '올림피아, 민족의 제전과 미의 제전'이라는 레니 리펜슈탈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는데 20분 가까이 나오는 손기정의 영상을 보고 조선인들은 감격하였다.
손기정은 2시간 30분 벽을 깨고 2시간 29분 19초라는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고 2등은 영국의 하퍼, 3등은 조선 청년 남승룡이었다. 손기정은 머리에 월계관을 썼지만 만세를 부르지도 않았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가슴에 단 일장기를 가렸다는 소문도 있다. 일장기를 달고 달린 사실 그리고 우승한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우승할 마음을 가지고 달렸겠지만, 그 마음 한구석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이 함께 있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에 들어갔다. 졸업과 동시에 은행에 취직하여 한동안 은행원 노릇을 하기도 했지만, 본업은 달리는 일이었다. 해방 후 체육에 관심이 많던 몽양 여운형의 눈에 들어 한때 그가 하는 일을 돕기도 하였지만, 몽양이 1947년에 저격당해 세상을 떠나게 되어 그 인연도 끊어졌고 혼란하기 짝이 없는 정국 속에서 체육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려고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체육계 또한 정계 못지않게 혼란하여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70대 후반의 나이에 한 번 우리 집에 와서 식사를 하였는데 그리 높지도 않은 우리 집 2층까지 계단을 힘겹게 올라왔다. 25세 때에는 잘 달리던 두 다리 힘을 과시하며 독재자 히틀러를 놀라게 했던 그 청년이 걷기조차 어려워하는 노인이 된 것을 보고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내가 군사정권에 시달리며 감옥에 들락날락하던 때 무슨 일로 손기정을 만나면 다정한 목소리로 "김 교수, 고생이 많지요"라고 한마디 위로의 말을 던지곤 하였다. 언제 만나도 그는 정의감이 강한 강직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그를 기념하는 조그마한 공원이 시내 만리동 양정학교 안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아직 가보지는 못했다.
손기정 이후 한국의 마라톤은 1947년과 1950년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하고 1992년 56년 만에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딴 황영조와 2001년 보스턴마라톤에서 이봉주 우승으로 그 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2012년 손기정 탄생 100주년에 태어난 새로운 후배가 또다시 베를린올림픽의 영광을 되살리는 준비를 하고 있을 것으로 나는 믿는다. 손기정은 1936년 그 감격을 함께한 모든 한국인에게 언제나 그립고 언제나 고마운 마라톤의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