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론,에피소드

카스트라토(Castrato)는 언제 사라졌나?

나그네46 2015. 8. 27. 23:42


 

카스트라토는 변성기 이전에 고환을 제거한 남성 소프라노 가수를 일컫는 말이다. 카스트라토는 교회 성가대에서 여성의 활동을 금지함으로써 생겨난 관습으로 1565년께 교황 전용 예배당인 시스틴 성당 합창단에서 시작되어 세속 오페라 무대로 이어졌다.

오페라의 역사는 곧 카스트라토의 역사다. 몬테베르디, 글룩, 헨델, 모차르트가 카스트라토를 위한 아리아를 작곡했다. 페리의 ‘에우리디체’(1600),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1607), 비탈리의 ‘에레투사’(1620) 등 초창기 오페라에는 어김 없이 카스트라토가 등장한다.

카스트라토는 거세 수술 후 정상적인 신체 발육은 가능하지만 남성의 2차 성징은 나타나지 않는다. 후두는 성인 남자의 3분의 1 크기다. 성대는 보통 남성보다 짧지만 여성보다는 길다. 울대뼈도 나오지 않는다. 맑은 여성 목소리와 함께 남성 목소리도 아울러 갖게 되어 3옥타브에 이르는 매우 넓은 음역을 소화해 낼 수 있다.

이탈리아는 카스트라토의 최대 수출국이었다. 아들 덕분에 팔자 고쳐 보겠다고 너도나도 어린 아들의 고환을 잘라냈다. 거세 수술의 부작용으로 많은 소년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비싼 몸값에 눈이 어두워 가난한 농민들은 아들을 카스트라토의 길로 내몰았다. 카스트라토는 대부분 고아 출신이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부모가 보상금을 받는 대신에 아들의 거세를 허락하거나 카스트라토가 누리는 높은 명성과 부를 기대하면서 기꺼이 거세하는 경우도 많았다. 파리넬리처럼 성공한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남자 구실도 한 번 못해 보고 불행하게 살았다.

18세기에 정상급 카스트라토는 오늘날의 팝스타와 같은 지위를 누렸다. 자신이 좋아하는 카스트라토의 초상을 새긴 배지를 달고 다니는 것이 유행일 정도였다. 카스트라토는 프리마돈나의 변덕스러움을 그대로 물려받아 엄청난 액수의 개런티를 요구하기도 했다. 기독교는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막론하고 카스트라토의 결혼을 금지했다. 그러자 사기 결혼도 불사하는 등 나쁘게 처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찌감치 거세해 성기가 발달하진 않았지만 성욕은 왕성했다. 절대 상대 여성이 임신하지 않는다는 ‘안전성’ 때문에 상류 사회의 남성과 여성을 위한 고급 매춘부 역할도 했다. 카스트라토는 강하면서도 높은 소리를 좋아한 서양인들의 음악 취향이 빚어낸 희생양이었지만 폐해 또한 매우 컸다.

1806년 11월 27일 이탈리아를 점령한 나폴레옹 황제는 오페라극장에서 카스트라토의 출연을 금지했다. 그는 카스트라토의 온상이었던 나폴리 음악원에 거세한 소년의 입학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카스트라토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로시니, 마이어베어, 모차르트 등의 오페라에도 카스트라토가 나온다. 카스트라토를 위해 작곡한 마지막 오페라는 1824년 3월 7일 베네치아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한 마이어베어의 ‘이집트의 십자군’이다. 엘미레노로 변장한 기사 아르만도 도르빌레 역을 카스트라토가 맡았다.

프랑스 혁명 이후 숫자가 급격히 줄어든 카스트라토는 알렉산드로 모레스키를 끝으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모레스키는 1883년부터 1913년까지 시스틴 성당 합창단원으로 있었다. 음질이 나쁘긴 하지만 유일하게 남아 있는 카스트라토 레코딩의 주인공이다. 요즘엔 카운터 테너나 알토가 카스트라토를 대신해 노래를 부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카스트라토는 언제 사라졌나 (오페라 보다가 앙코르 외쳐도 되나요, 2012. 5. 31.,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