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양당제의 신음
미국 정치가 막장극 같다. 사사건건 의회의 벽에 막힌 대통령은 행정명령이라는 편법을 써서 아예 의회를 건너뛰어 버렸다. 격분한 야당은 법정 소송을 냈다. 미국과는 어울리지 않는 저급한 정쟁이다. "무정부 상태" "폭력을 볼 수도" "사악한 인종 정치" "탄핵" 등 오가는 말도 도를 넘었다. 이런 미국 정치를 '거부권 정치'(vetocracy)로 부른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출구가 없다"고 했다. 여야 타협 실패로 연방정부가 마비되는 위기가 일상화될 우려도 커지고 있다. 정말 미국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정치 폭력을 다시 보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미국 정치의 쇠퇴를 다루면서 세계 여러 나라가 중국 정치를 다시 보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심각하고 위험한 비정상 상태다.
한때 세계 민주주의 모범, 한국 대통령제의 이상으로 칭송됐던 미국 정치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사회의 양극화와 정치의 양극화가 서로 부채질한 결과라고 한다. 돈을 굴리는 헤지펀드 운영자 한 사람이 제조업 근로자 몇 백, 몇 천 배의 연봉을 받는 미국 사회는 경제적으로만 아니라 인종적, 지역적, 이념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점점 더 양극화되고 있다. 이렇게 양극화된 표밭에서 예비선거와 본선거를 치러야 하는 미국 정치도 자연히 양극화될 수밖에 없다. 9·11 테러와 흑인 대통령 등장은 정치 양극화에 기름을 부었다. 중간층을 잡기 위해 노력하던 과거의 선거운동은 자취를 감추고 자기 지지자들을 향한 더 강하고 원색적인 주장이 판을 치고 있다.
그렇게 뽑힌 의원들은 미국 정치의 최대 미덕이었던 초당파적 활동을 멀리하고 당파 싸움의 최전선으로 앞다퉈 나선다. 과거엔 어느 행사를 가든 여야 의원이 반반 정도 있었는데, 이제는 어느 모임이든 여야가 95대5 아니면 5대95로 있다고 한다.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의 말이다. 이런 정치 현장의 극단적 당파 싸움이 다시 미국 사회를 양분하고 양극화시키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2000년 '부시 대(對) 고어'와 같은 애매한 박빙 승부가 벌어질 때 미국 정치의 또 다른 미덕이었던 '용기 있는 승복'마저 나오지 않는다면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의 위기다.
미국 정치의 쇠락을 대통령 양당제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보는 학자도 많다. 미국에서 시작된 대통령제는 왕(대통령)을 선출하되 의회가 견제하도록 만든 장치다. 정교하긴 해도 양보, 존중, 타협과 같은 기본적인 선의(善意)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 윤활유가 떨어져 부서질 듯 덜컹거리는 게 지금 미국 대통령제다. 선의라는 자산은 한번 사라지면 쉽게 재생되지 않는다. 미국 대통령제마저 병들면 전 세계 87개 대통령제 국가 중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게 된다.
대통령제가 다시 돌아가게 만드는 데 큰 장애물이 되는 것이 바로 확고한 양당(兩黨)제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졌던 양당제는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선의가 없으면 양극제(兩極制)가 된다. 내각제는 양극제 상황이 되더라도 의회 해산이라는 출구라도 있다. 대통령제는 양극제와 만나면 출구가 없다. 미국에서 2010년에서 2012년까지 중요한 국가 이슈 중 4분의 3이 아무 결정도 내려지지 않은 채 표류하고 있다는 조사도 있다.
미국 정치 상황이 한국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직면한 것도 바로 '대통령제+양극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 문제를 제도 탓으로만 모는 것은 옳지 않다. 세상에 완벽한 정치 제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실제론 아무것도 못 하면서 뭐든 다 할 것처럼 하는 대통령'과 '뭐든 다 하면서도 실제론 아무것도 못하는 국회', '아무것도 안 하고 오로지 상대 죽일 궁리만 하는 여야 양당'이 장차 우리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해 진지한 논의는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대통령 양극제는 세계에 웃음거리가 된 국회 육탄전 아니면 상시적인 교착·마비 상태를 오가고 있다. 이런 틀을 갖고서 양보와 희생, 조정, 타협이 필요한 저출산·고령화 대책, 복지와 증세, 연금 개혁, 노동 개혁, 원자력 갈등, 산업과 환경의 조화,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희망 사항이다. '남북 대치 상황에 대통령제가 필요하다'는 오랜 인식도 검증이 필요하다. 내각제 독일은 통일을 이뤘고 영국은 전쟁에 이겼다.
우리나라에서 어느 날 갑자기 봄눈 녹듯 양당의 적의와 불신이 사라지고, 철인(哲人) 같은 대통령이 등장할 수 없다. 만사를 제도 탓으로 돌려서도 안 되지만 제도가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지금의 이 정치 틀에서 나라의 운명이 걸린 과제들을 풀어갈 생산적 리더십이 결코 나오지 못할 것이란 절망감을 너무나 많은 사람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양상훈 조선일보 논설 주간>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2014.11.27]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