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태어났으니 사는 것이지요
"매달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로 왔다 갔다 하니, '홍길동 기도회'라고 해요. 5000명 이상 인원이 몰려가요. 그쪽에선 사흘간 임시 장날이 됩니다. 청양군수가 '고추·구기자 축제' 기간에 와 달라고 여길 다녀갔어요. 희방사로 떠날 때는 영주시장이 찾아와 '풍기 인삼 축제에도 들러 달라'고 해요. 다 좋은 일이지요."
늦은 오후, 도선사 경내의 뒷전에 있는 승방에 앉았다. 절의 주지인 선묵혜자(59) 스님은 자랑을 참지 못하는 '아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게 자연스러웠다.
그는 일반 대중을 이끌고 달마다 '108 산사(山寺)'를 순례해 왔다. 인원이 너무 몰려 하루에 함께 다 못 가고, 목금토 사흘에 나눠 간다. 그는 사전 답사까지 포함해 같은 절에 네 번을 연달아 가는 셈이다. 대절버스가 108대 이상 동원된다고 한다.
―왜 이리 인기가 좋나요?
"요즘 많이 생겨난 사찰 순례의 '원조'였지요. 신도들이 '안 그래도 친구끼리 삼삼오오 명승지 절을 찾아다니려고 했는데' 하며 모여든 거죠. 한 달에 한 번씩 가족소풍 가는 겁니다. 어떤 가족은 자식 부부, 손자들까지 9명이 참여합니다. 순례길에는 무지개가 뜨곤 해요. 부처님의 가피(신도들의 기도를 들어줌)를 보이시는 겁니다."
―무지개가 뜨는 건 자연현상일 뿐입니다.
"(웃음)자연현상이죠. 그걸 보고 신도들이 신심을 내는 겁니다. 무지개가 목금토 중 토요일에 자주 떴어요. 그러니 신도들이 토요일에만 몰려요. '이거 안 되겠다' 싶었는데, 그 뒤로 목금요일에도 고르게 떴어요. 지금까지 서른 번쯤 떴습니다. 지난 초파일에는 무지개 사진 전시회를 했어요."
당초 그의 주변에서 "스님과 대중이 함께 하는 사찰 순례가 꼭 5년이 됐으니 알릴 만하지 않은가" 했을 때,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바싹 마른 수행자의 모습을 개인적으로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절집 살림을 하고 고요하게 수행하는 게 제격인데, 이렇게 분주한 '행사'처럼 다닙니까?
"은사스님 청자 담자(靑潭)께서 '산중에서 거리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가야 한다'고 법문을 했어요(실천불교를 뜻함). 처음에는 백팔번뇌를 소멸하고 자비 나눔을 실천하고 백팔염주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점점 '업그레이드'된 겁니다."
―순례에도 업그레이드가 있습니까?
"해인사에서 8만대장경을 둘러보고 일주문을 나왔을 때죠. 그 초입에 동네 할머니들이 더덕, 고사리, 도라지를 파는데, 신도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어요. 제가 '버스 시간이 급하다'고 했어요. 버스 안에서 한 신도가 '스님, 천리길을 왔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면 밥상에 올릴 찬거리를 사러 가야 한다. 여기 친정어머니 같은 할머니들이 농산물을 팔고 있는데 장볼 시간을 줘야 한다'고 해요. 그때는 '내가 장가를 가봤나 무얼 알겠소' 하고 웃어넘겼어요. 그 뒤로 순례를 갈 때면 지역농협을 통해 직거래 장터를 마련하라고 미리 알려줍니다. 우리가 가는 절마다 사흘 내내 큰 장이 열리죠."
그런 뒤 이번에는 "국군 장병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 뭔지 아느냐?"고 거꾸로 내게 질문했다. 또 '자랑'을 꺼내기 위한 것이었다.
"논산훈련소 근처인 관촉사에 갈 때 신도 일인당 초코파이 한 갑씩 준비했어요. 장병들에게 전달해주려는 뜻이었습니다. 법당 상(床)에 초코파이가 수북하게 쌓였습니다. 예불이 끝난 뒤 장병들이 이를 날랐어요. 그러던 중 떨어져 있는 초코파이를 서로 주워 먹으려다 상다리가 부서졌어요. 우리 엄마들이 그 장면을 보고 눈시울을 적셨어요. 한 번 행사로 끝내려고 했는데 '어차피 108산사 가는 곳에는 군부대가 있다. 아들딸에게 간식거리를 갖다 주자'는 겁니다. (메모를 보면서) 지금까지 전해준 초코파이가 237만개가 돼요."
―(웃음)초코파이 만드는 제과업체에서 감사패를 안 줍니까?
"안 그래도 몇 달 전 감사패를 받았어요. 돈으로 4억원이 넘는다고 그래요."
―사찰 순례에는 늘 동행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름이 '선묵혜자 스님과 함께 마음으로 찾아가는 108산사 순례기도회'인데, 제가 빠지면 안 되죠. 가는 절마다 순례단에게 직접 절 이름을 새긴 염주알을 나눠주죠. 지금까지 108사찰 중 61곳을 돌았어요. 9년이 걸릴 대장정입니다."
―순례단은 한 달에 사찰 한 곳을 가지만, 스님은 목금토 연달아 가고 사전답사까지 한다면서요?
"작년에 면역이 떨어져 제가 대상포진에 걸렸어요.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진통제를 먹고 갔어요. 경남 고성의 연화산에 있는 옥천사에 갈 때만 사흘 중 딱 하루를 못 갔어요. 톨게이트까지 나갔다가 쓰러질 것 같았으니까요."
―지금까지 순례하면서 어느 절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까?
"중이 이 절 저 절 비교하면 안 되죠. 제가 거처하는 도선사가 살고 싶은 절이지요."
―출가를 언제 했습니까?
"초등학교 졸업한 해 속가 나이 열셋에 들어왔지요."
그는 청담스님의 제자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청담스님이 열반할 때(1971년)까지 곁에서 시봉했다.
―당시 무슨 생각으로 머리를 깎았습니까?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를 갈 수 없었어요. 마침 친척 중 한 분이 여기 도선사에 스님으로 계셨어요. '절에 가면 네 한 입 덜고 한문 공부도 할 수 있지 않나' 했어요. 고향이 충주인데 절을 처음 본 게 초등학교 때 탄금대로 소풍 갔을 때였어요. 울긋불긋해서 무서웠죠. 절에 들어올 줄은 몰랐죠."
―잘 들어온 것 같습니까?
"속가에 나가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어요. 부처님 제자가 안 됐으면 내가 어떻게 됐을까 이런 생각은 해보는데, 아마 농사꾼이 됐겠지요. 초등학교 졸업할 때 이미 지게로 소금 한 가마를 졌으니까요. 동네 노인들이 '큰 일꾼 났다' 했어요. '인신난득 불법난봉(人身難得 佛法難逢)'이라, 태어나서 사람 몸을 받았고 부처님까지 만났으니 더 바랄 게 없지요."
―깨달음을 얻겠다는 목표로 출가한 이들조차 방황을 많이 하는데, 스님의 경우 생계형인데 무난했다는 뜻인가요?
"그 어린 나이에 예불이 끝난 뒤 선방에서 좌선을 하고 싶었어요. 큰스님께 '참선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화두(話頭)를 던져주시길 기다렸어요. 스님께서 '참선하고 싶은 이놈이 무엇인고? 그걸 찾아라'고 했어요. 나무 아래에 앉아 어린 아이가 좌선을 했으니…, 지금 생각해 봐도 전생이 있다면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었던 것 같아요."
―출가 후 어떤 승려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습니까?
"그런 생각 없이 살아왔습니다. 부모형제가 다 떠났고 처자식이 없으니, 오직 큰스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면서 남들에게 베풀다 가는 것이지요."
―나고 살고 죽는 문제에는 해답을 얻었습니까?
"한때는 저도 오래 살기를 원했지요. 하지만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우리 삶입니다. 태어났으니 사는 것이지요."
―천재 스티브 잡스의 죽음에도 그렇지만, 대중은 자신의 죽음에는 두려워하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갖습니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봅니까?
"신도들의 장례식에 가서 저도 독경과 염불을 합니다. 상주들의 슬픔을 쭉 보아왔지요. 하지만 죽음은 자연의 현상입니다. 태어났다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죠.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일찍 오느냐 늦게 오느냐의 차이일 뿐이지요. 각자 주어진 삶에서 사람답게 사는 것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도를 깨쳤다는 스님, 토굴에서 열심히 수행했다는 스님, 일탈을 일삼는 스님 등 그동안 여러 스님을 만나봤습니다. 그중에는 '경전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고 대신 절의 지붕이나 보일러를 고치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다'고 털어놓은 스님이 있었지요. 이분은 결국 네팔 룸비니에 가서 대성석가사를 직접 설계하고 스스로 노동을 해서 지었습니다.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당나라 스님 포대화상을 따릅니다. 이분은 자루를 메고서 하늘을 지붕 삼고 구름을 이불삼아 저잣거리를 떠돌아다녔지요. 중생의 번뇌 망상은 자루 속에 담고, 힘든 중생에게는 기쁨과 웃음, 희망을 주셨지요. 불교계의 산타클로스입니다."
―요즘 세상이 그런지 절집 인심도 각박해졌다고들 합니다.
"신도, 불자, 등산객이든 아침 점심 저녁 세 끼 공양을 주는 데는 도선사뿐일 겁니다. 인연 따라오면 먹고 갑니다. 큰스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입니다."
―도선사는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머물며 기도한 도량으로도 유명해졌지요?
"제가 열다섯 살 때(1967년), 육 여사께서 여기서 일주일간 기도를 하셨지요. 당시 대통령선거를 앞뒀을 때입니다. 대중의 눈을 피해 낮에는 방에 머물고 저녁에 올라가서 기도했어요. 제가 방 닦을 걸레를 빨아드렸어요. 그러면 '우리 동자스님 손 시리니 내가 빨겠다'고 했어요."
―그때만 해도 영부인이 절에서 일주일 기도를 할 수 있는 시절이었습니다.
"허, 한 생각 돌리면 아무것도 아닌데. 우리 집안에는 할머니는 교회, 어머니는 성당을 다녔어요. 다 돌아가셨지만. 제가 중이 됐으니 '불기가(불교 기독교 가톨릭)' 종교를 믿는다고 해요. 어머님 돌아가셨을 때 성당에 가서 승복 입고 미사에 참여했지요. 우리 절에서는 한 배 한 배 절할 때마다 기도문을 읽는데, 91배에는 '믿음이 다르다 하여 배척하거나 무시한 잘못이 있으면 참회하옵니다'라는 게 있습니다."
―스님은 선방 수좌는 아니고, 지금의 자신 모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법호가 '선묵(禪默)'이라 선을 묵묵하게 해야 할 사람인데, 제 성품도 그렇고…. 대중과 함께하는 사찰 순례도 '행선(行禪)'하느니 여기는 겁니다. 태어나 살다가 인연 따라가는 것이지요. 다 인연놀음인 것 같아요."
―108 산사 순례가 5년이 됐다고 저와 인터뷰를 원했습니까?
"우리가 만난 것도 인연법에 의한 것이지요." ▣
[조선일보, `최보식이 만난 사람' 도선사 주지 선묵혜자 스님, 2011.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