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르네상스'가 `양반'이면 `바로크'는 `망나니'다.
"르네상스가 '양반'이라면 바로크는 '망나니'죠. 그런데 망나니가 더 사람다울 때가 있거든. 인간 본성에 내재한 망나니 기질을 억제하지 않고 마음껏 발휘한 게 바로크랄까요."
바로크(Baroque). '일그러진 진주'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바로코(barroco)'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17세기 유럽을 지배했던 격정적이고 감성적인 예술사조를 일컫는다. 이성적이고 조화로운 르네상스 시기를 지나 등장한 이 무분별하고 무절제한 예술사조는 마치 망나니 자식이 집안 망신을 시킨다는 식으로 오랫동안 홀대받아왔다.
서울대 미학과 교수를 지낸 원로 미학자 임영방(82) 전(前)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바로크의 특성과 출현 요인 등을 분석한 책 '바로크-17세기 미술을 중심으로'(한길사)를 냈다. 950쪽에 달하는 이 책은 200자 원고지로 6000매, 집필기간만 4년이 걸렸다.
정제된 르네상스 시기를 지나 바로크가 출현할 수 있었던 주 요인으로 두 가지가 꼽힌다. 종교개혁운동에 대항하는 가톨릭 교회의 반(反)종교개혁 운동이 하나. "종교개혁 이후 반성과 자숙에 들어간 가톨릭 교회는 미술을 통해 신자들에게 확고한 교리를 전달하고 신앙심을 고양시키고자 했죠. 그러려면 감성적이고 강렬한 묘사와 표현을 통해 신자들이 미술작품 속 사건을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리스도의 수난마저도 아름답거나 평온하게 묘사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표현양식은 사라졌다. 성인들의 순교가 공포감이 감돌도록 실감나게 그려졌다. 영적 체험 후 황홀경에 든 성인의 모습을 생생하고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유행했다.
바로크 출현 배경의 한 축이 '종교'라면 다른 한 축은 '정치'였다.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기반으로 한 유럽의 절대왕정체제는 왕의 권위를 찬양하고 치켜세우기 위한 예술양식을 필요로 했다. 그 중심에 궁전건축이 있었다. "'태양왕' 루이14세 때 건립된 베르사유 궁전 중앙에 설치됐다가 루이 15세 때 보수과정에서 없어진 의전용 계단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화려하고 장엄하면서 끝없이 상승하는 듯한 계단은 왕의 위엄과 권위를 대변하지요." 종교적 성스러움을 시각화하기 위한 바로크 미술의 중요한 요소였던 '환각'은 국왕을 살아있는 신(神)의 이미지로 구현하기 위해 환상이 필요했던 당시 정치상황과도 부합했다.
임 전 관장은 프랑스 유학 중이던 1950년대 말, 바로크 예술의 정체 규명을 위한 토론의 장이었던 부르고뉴 지방의 수도원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이 책을 구상했다.
매일 7시간씩 집필해 50년 만의 결실을 이룬 임 전 관장은 부인(61) 이야기를 꼭 써달라고 했다. "손으로 쓴 원고 타자쳐야지, 교정 봐야지, 주석 확인해야지, 도판 찾아야지, 출판사 왔다갔다해야지…. 저는 원고만 썼다 뿐이지 나머지는 아내가 다 했죠." ▣
[조선일보 2011.9.16. 신간서적동향 ]
** 르네쌍스(Renaissance, rinascenza)
르네상스는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프랑스어의 renaissance, 이탈리아어의 rina scenza, rinascimento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고대의 그리스·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킴으로써 새 문화를 창출해 내려는 운동으로, 그 범위는 사상·문학·미술·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5세기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그때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야만시대,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로 파악하고 고대의 부흥을 통하여 이 야만시대를 극복하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 운동은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이 운동은 곧 프랑스·독일·영국 등 북유럽 지역에 전파되어 각각 특색있는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근대 유럽문화 태동의 기반이 되었다. 이때의 르네상스 외에도 문화부흥 현상이 보인 기타의 시대에 대해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 오토 왕조의 르네상스, 12세기의 르네상스, 상업의 르네상스, 로마법의 르네상스 등이 이에 속한다. 르네상스라는 개념 형성은 이미 그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사상의 기본요소는 F.페트라르카가 이미 설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고대를 문화의 절정기로 보는 반면, 중세를 인간의 창조성이 철저히 무시된 ‘암흑시대’라고 봄으로써 문명의 재흥(再興)과 사회의 개선은 고전학문의 부흥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크나큰 확신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단순한 라틴 학문의 부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지적(知的)·창조적 힘을 재흥시키려는 신념에 차 있었다.
당시 L.브루니는 자기 시대의 학문의 부활에 대하여 기술하였고, 16세기의 미술가 G.바자리는 저서 《이탈리아의 가장 뛰어난 화가·조각가·건축가의 생애》에서 고대 세계의 몰락 이후 쇠퇴한 미술이 조토에 의해 부활했다고 하여 ‘재생(rinascita)’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다시 볼테르는 14·15세기의 이탈리아에 학문과 예술이 부활했음을 지적했으며, J.미슐레는 16세기의 유럽을 문화적으로 새로운 시대라고 하여 처음으로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 그리고 합리적인 사유(思惟)와 생활태도의 길을 열어 준 근대문화의 선구라고 보고 이와 같은 해석의 기초를 확고히 닦은 학자는 스위스의 문화사가 J.부르크하르트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860년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문화》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시대’로서의 르네상스라는 사고방식이 정착하여 오늘까지의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르네상스와 중세를 완전히 대립된 것으로 파악하고, 근세의 시작은 중세로부터가 아닌 고대로부터라는 주장에 이르게 되었으며, 중세를 지극히 정체된 암흑시대라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연구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여 르네상스의 싹을 고대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중세에서 찾아야 하며, 르네상스를 근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
** 바로크음악(Baroque Music)
바로크라는 시대양식의 개념은 본래 미술사 분야에서 일어나, 그 후 음악사 분야로 이행되었다. 그 최초의 시도는 1920년의 C.작스의 논문 <바로크음악>이다. 이 무렵부터 음악사에도 적용되어 일반화하였다. H.리만처럼 이 시대를 통주저음(通奏低音)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로크음악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재인식되었으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나라에서 지지자가 생겼다.
1세기 반의 역사 속에서 바로크음악은 가지각색으로 변화하였다. 나라에 따라서도 각기 다른 양식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앞의 르네상스시대나 후의 고전주의시대의 음악과 비교하면, 먼저 그 어느 쪽에도 없는 통주저음의 존재가 바로크음악을 특징짓는 요소로서 떠오른다. 이 기법은 최저성부(最低聲部)가 그 악곡 전체의 화음을 뒷받침하는 기능을 지녔다.
바로크음악의 독특한 울림은 확고한 베이스의 선(線)과 그 위에 전개되는 상성부의 선율성이라고 하는 양외성부(兩外聲部:最高와 最低聲部)의 강조에 의거한다. 바로크예술이 지닌 빛과 그림자의 효과나 대비성은 음악에서는 협주양식에서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음향체를 협주적으로 어울리게 하는 방법은 바로크음악의 선구자 G.가브리엘리에 의해서 추구되고, 17세기에 기악과 성악의 양면에서 발전하였다.
한편 르네상스시대에 배양된 폴리포니의 악곡원리는 바로크음악에서도 중요한 작곡기법의 하나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17세기를 통해서 차차 확립되어 간 장조·단조의 조성에 따라서 화성적·수직적으로 규정된 것으로의 변질이 나타나 있다. 음악표출에 관해서는 아직 고전파에서와 같은 ‘개(個)’의 표출은 아니었다. 작곡가는 극적인 효과를 위하여 유형적(類型的)인 정감의 표출을 의도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다시 수사학이나 시학에서 관념을 차용한 것이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바로크음악은 장르적으로 관찰하면 성악에 대한 기악의, 교회음악에 대한 세속음악의 대두와 발전의 시대였다. 성악에서는 오페라·오라토리오·칸타타, 기악분야에서는 모음곡·트리오소나타·콘체르토그로소·변주곡 등이 즐겨 작곡되었다. 이 곡들은 모두 다악장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각각 개별적으로 독특한 성격을 지닌 악곡(樂曲:樂章)을 통일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하나의 보다 큰 형식을 형성하는 수법도 이 시대에 자주 쓰인 형성원리(形成原理)였다.
바로크음악의 역사
바로크음악의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⑴ 초기(17세기 전반):바로크음악은 오페라의 성립과 함께 시작되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쳐, 이탈리아에서는 언어의 극적인 표출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다. 피렌체의 문인그룹 ‘카메라타’는 언어의 리듬에 지배된 독창에 의한 음악적 낭송(朗誦)형식이라고 해야 할 모노디양식을 만들어냈다. C.몬테베르디는 대담한 불협화음의 사용에 의하여 마드리갈에서의 드라마틱한 효과를 노리고, 그것을 제2의 작법(언어를 중시한 새로운 작곡법)이라 명명하여 새로운 음악적 태도를 표명하였다.
피렌체의 모노디는 음악적으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지만, 언어의 극적이고 자유스런 표출의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오페라의 성립을 촉진시키는 중대한 요인이 되었다. 1600년에는 최초의 오페라가 J.페리와 G.카치니에 의해 발표되었다. 1607년에는 모노디원리를 사용한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가 완성됨으로써 최초의 예술적인 바로크오페라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오페라는 그 후 베네치아악파·나폴리악파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한편 좀더 실내악적인 방향으로는 칸타타가 성립되었고, 모노디양식과 협주양식은 H.쉬츠에 의해서 독일에도 도입되었다. 그는 북방의 영향을 받은 폴리포니양식과 이탈리아로부터의 새로운 양식에 입각하여, 그 후 J.S.바흐에 이르는 독일 프로테스탄트음악의 길을 독일 중북부에 마련하였다. 한편 남독일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탈리아오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⑵ 중기(17세기 후반):이 무렵이 되자 기악이 눈부시게 발달하였다. 특히 바로크음악의 구성관(構成觀)을 구현한 트리오소나타의 작법이 완성되고, 이것은 형식 및 악곡의 구성원리가 되었다. 모음곡형식을 취한 실내소나타와 교회소나타는 대부분 트리오소나타로 작곡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발레에 중점을 둔 궁정오페라가 륄리에 의해서 전성기를 이루고, 또 류트·클라브생 음악도 그 감각적 색채를 연마해 나갔다.
⑶ 후기(17세기 말∼18세기 중엽):조성이 완전히 확립되고, 근대 화성악의 기초가 J.P.라모에 의하여 수립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합주협주곡의 명인 A.코렐리·A.비발디, 독일에서는 G.P.텔레만·G.F.헨델·J.S.바흐 등 거장이 배출되어 바로크음악은 그 절정을 이루었다.
** 종교개혁
![]() | ||||||||||||||||||||||||||||||||||||||||||||||||||||||
이를 통해 오늘날 프로테스탄트라 부르는 교파가 생겼다. 이 운동은 광범위하게 벌어졌는데, 특히 17,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퓨리터니즘도 넓은 의미로는 이 운동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출처] 종교개혁|네이버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