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론,에피소드

[스크랩] 클래식악보 임대의 세계

나그네46 2011. 4. 17. 23:36

   클래식 공연장 객석엔 음악 애호가도, 악기 전공생도, 평론가도 있다. 그리고 한 사람 더. 연주 단체가 사전에 허락받은 악보를 사용하는지 확인하러 오는 사람도 있다. 국내에 하나뿐인 악보 대여업체 KMS(코리아 뮤직 서비스)에서 5년째 악보 '렌털(rental·임대)'을 담당하고 있는 박정은(30)씨다. 박씨는 국내 악단들에 악보를 빌려줬다가 수거하는 일명 '악보 빌려주는 여자'다.
   박씨는 1주일에 한 번 클래식 공연장을 찾아 당초 신청한 대로 곡목을 연주하는지, 실황 연주가 방송에 나가는 건 아닌지, 악장만 연주한다고 했는데 전체 곡을 다 연주하는 건 아닌지 검사한다. 애초 목적과 다르면 '벌금'을 부과한다.
◆악보도 '렌털'한다
   박정은씨가 이렇게 악보를 체크하는 것은 클래식의 독특한 관행 때문이다. 베토벤 시대부터 출판사는 작곡가에게 돈을 지원하는 대신 악보 독점 출판권과 저작권 관리를 맡아왔다. 음악가들은 '렌털'이란 방식으로 연주회마다 악보를 돈 내고 사용한다. 베토벤·모차르트 등 저작권이 소멸된 작곡가의 악보는 영구 구입하지만 현대 작곡가의 악보는 대부분 이렇게 빌려서 쓴다.
   악보를 복사해 쓰다가 들키면 렌털비의 2~3배에 달하는 벌금과 국제적 망신을 각오해야 한다. 2000년대 초반 국내 어느 유명 교향악단이 저작권이 걸린 악보를 빌리지 않고 복사해 연주한 적이 있었다. 이탈리아 출판사는 바로 다음 날 사람을 서울로 보내 벌금을 물렸다. 최근에도 이런 일은 종종 발생하고 있다. 작년 봄 A교향악단은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을 렌털하지 않고 그냥 연주하려다 1주일 전 KMS의 모니터링에 걸려 렌털비를 지급했다. 작년 여름 B교향악단은 '랩소디 인 블루'를 작곡가 거슈윈의 저작권이 소멸된 줄 알고 하려다 제재를 당했다. 거슈윈이 죽은 지 50년이 지났지만 후대의 작곡가가 이 작품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편곡하면서 저작권이 다시 발생한 탓이다. 박정은씨는 "해외에서는 아직도 한국 하면 '복사본을 많이 쓰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악보사는 부지 앤 호크스(영국), 듀란(프랑스), 셔머(미국) 등. KMS는 그중 유니버설 에디션(오스트리아)과 쇼트뮤직(독일)의 업무를 대행한다.
◆렌털비용은 천차만별
   수준 높고 유명한 작품일수록 저작권이 엄격하다. 그래서 각 악단에는 악보 구입과 렌털을 책임지는 악보전문위원이 있다. 서울시향 악보전문위원 김보람(29)씨는 "공연 3개월 전 곡이 어느 출판사에 있는지 확인한 다음 주문을 넣는다"며 "주문서에는 연주날짜와 장소는 물론 연주자 수와 연주 횟수, 입장료, 좌석 수, CD녹음·방송중계 여부까지 적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렌털비는 얼마나 될까. 서울시향이 지난해 악보 대여에 쓴 돈은 659만8736원. 이 비용은 그러나 정기 공연 중에서도 네 번의 공연에서 빌린 값만 계산한 것이다. 전체 렌털비를 합하면 비용은 서너 배.
   지난달 24일 정기 공연 때 서울시향이 연주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쇼트뮤직)는 1회 연주에 96만6000원, 배송비(왕복) 32만2000원을 합해 총 128만8000원을 줬다. 지난해 8월 말러 교향곡 2번(유니버설 에디션)은 오케스트라 악보와 더불어 합창 악보 150부도 같이 렌털하면서 2회 공연에 총 293만6600원을 썼다. 실황을 CD로 녹음하거나 TV로 방송하면 렌털비가 갑절로 뛴다.  ▣

 <조선일보 2011.4.13.문화면 김경은기자>